
국민 모두에게 물어도 유사한 대답이 나올 것 같다. 대한민국의 정치, 그리고 정치인에 대한 각자의 평가를 물었을 때 말이다. “후진적이다. 답이 없다. 국민은 없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따지는 것 같다. 늘 정쟁뿐이다” 감히 장담하는데, 이런 부정적 평가들이 압도할 것이다. 둘로 극명히 갈린 나라에서 정치에 대한 혐오만큼은 생각이 같다고 해야 할까.
‘피청구인 윤석열을 파면한다’는 마지막 주문과 함께 대통령 탄핵 심판 사건이 지난 4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최후 변론 이후 좀처럼 잡히지 않는 선고일에 각종 추측이 난무했지만, 결론은 8대0. 이론의 여지 없는 완전한 파면이었다. 윤 전 대통령 측에서 제기했던 반론에 대해 헌재 재판부는 조목조목 반박하며 일말의 여지 조차 주지 않았다. 파면 선고 이후 이 결정문은 깔끔한 문장과 탄탄한 논리 구조로 세간의 화제가 됐다. 혹시 내란이 일어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결정문 낭독과 함께 말끔히 사라졌다.
넉 달간 이 사건의 기사 출고 책임자였던 내게 그날은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다. 잔잔한 억양으로 읽어 내려간 결정문이 전 국민을 상대로 한 하나의 호소문처럼 들렸었기 때문이었다. 인상적이었던 건 결정문의 논리 구조가 아니었다. 법조인들의 입을 통해 전달된 정치 본연의 기본적인 작동 원리와 이 기능의 회복을 주문한 문장들이었다. 진심이 느껴졌다.
비상계엄을 부른 정치의 실종은 행정부와 입법부의 거대한 충돌에서 비롯됐다. 재판관들은 두 헌법기관 사이의 정치 회복을 주문한다. 파면된 대통령만을 꾸짖은 것도 아니다. 국회에도 동시에 경고를 보냈다. 이례적으로 많은 탄핵소추로 인한 여러 고위공직자의 권한 행사 정지, 헌정사상 최초로 국회 예결위에서 증액 없이 감액에 대해서만 이뤄진 야당 단독 의결, 대통령이 수립한 주요 정책들이 야당의 반대로 시행되지 못한 현실 등. 재판관들은 대통령이 국회의 권한 행사가 권력 남용이라거나 국정 마비를 초래하는 행위라고 판단한 것은 정치적으로 존중되어야 한다고 했다. ‘억울한 마음’이 충분히 이해는 된다는 말이었다.
여기서 정치가 등장한다. 재판관들은 “피청구인 대통령과 국회 사이에 발생한 대립은 일방의 책임에 속한다고 보기 어렵고, 이는 민주주의 원리에 따라 해소되어야 할 정치의 문제”라 했다. 국회는 소수의견을 존중하고 정부와의 관계에서 관용과 자제를 전제로 대화와 타협을 통해 결론을 도출하도록 노력했어야 하고, 대통령 역시 국회를 협치의 대상으로 존중했어야 했는데, 국회를 배제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했다. ‘일방의 책임’ ‘대화와 타협’ 곱씹어보면 어릴 적 친구나 형제자매와 다툼이 있을 때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숱하게 들었던 단어들이다. 대한민국 의사 결정 구조의 최고 정점에 서 있는 이들이 어쩌면 아이들 싸움 보다도 못한 갈등을 이어왔다는 방증 아닐까. 정치로 풀어야 할 문제가 끝내 헌법이 정한 최고 사법기관의 판단까지 가고 만 것이다.
대통령 파면과 동시에 대선 레이스가 시작됐다. 큰 상처를 안고 이뤄지는 새 정부 출범이기에 정치의 기본 작동 원리를 주문한 이 결정문의 문구들이 부디 잊히지 않았으면 한다. 헌법의 위반 여부를 따지는 법조인들이 정치의 회복을 주문했다는 게 역설적이다. 이 불행한 현실이 부디 마지막이길 바랄 뿐이다.
정순식 사회부장 겸 전국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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