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경남 김해 은하사 & 장유사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사찰은 불교의 공간이면서,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입니다. 명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사찰들은 지역사회의 소중한 관광자원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우리는 산에 오르고 절을 찾습니다. 헤럴드경제는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 100곳을 소개하는 ‘내 마음대로 사찰 여행 비경 100선’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경남 김해 은하사 경내 모습.
경남 김해 은하사 경내 모습.

우리나라 불교 역사가 2000년인지, 1700년인지에 대해 대부분의 불자는 관심이 없겠지만 사찰기행을 하는 필자로선 종종 궁금증을 가질 수밖에 없다. 오래된 역사를 가진 사찰일수록 화마와 전쟁 등으로 창건 당시의 모습을 찾기 어려워 신화나 설화, 역사적 기록, 유적발굴 등에 의존해 보지만, 일부 기록의 진실성에 대해 의문이 생기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하동 칠불사, 밀양 만어사 등을 기행하면서 가락국의 역사와 김수로왕, 그리고 허황옥과 장유화상에 의한 인도불교의 유입에 대해 단편적이나마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불교를 배척했던 유학자이며, 중국 중심사상(中華思想)에 경도되어 있었던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의하면 불교 역사는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372년(고구려 소수림왕)부터 1700여년이 된다. 그러나 괴력난신(怪力亂神) 등 신화나 설화, 그리고 민간에서 전승되는 이야기를 기반으로 승려 일연이 작성한 ‘삼국유사’를 기반으로 한 삼국 이전의 기록에 의하면 불교의 역사가 1700년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중국이 아닌 인도로부터 유입된다.

나중에 신라에 복속되지만 초기 철기 문명을 받아들여 성장했던 가야국들의 역사 또한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존하고 있다. 금관가야 김수로왕의 왕비 허황옥은 김해 허씨의 시조이지만 고향은 인도 아유타로 기록돼 있다. 아유타국의 왕자 장유화상은 아버지의 명에 따라 16살 된 동생 허황옥을 데리고 파도를 잠재우기 위한 파사의 탑과 함께 김해에 도착했고,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과 동생이 혼인하게 한 것이다.

은하사 삼성각 내 장유화상 초상화
은하사 삼성각 내 장유화상 초상화

그리고 승려였던 장유화상은 서기 48년에 가락국에 남방불교를 전파했다고 하며 이는 고구려에 북방불교가 전파된 372년보다 무려 300년 이상 앞선 것이다.

장유화상이 머물렀다고 하는 은하사가 있는 김해의 신어산은 불모산(佛母山, 801m) 신화와 함께 남방불교 전래의 성지가 됐다. 장유사에는 장유화상의 사리탑이 있다고 하며 하동 칠불사도 이와 연관돼 있었다. 김해시에는 장유화상의 이름을 딴 장유동도 있고 아유타국의 문양인 쌍어(두 마리 물고기) 신앙이 곳곳에 어려 있다.

건국 신화나 창건 설화는 애초에 시조 또는 추앙하고자 하는 인물의 격을 높이기 위해 괴력난신(怪力亂神) 등을 엮어 전승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보니 허황옥 왕후 일행이 인도에서 왔다는 기록도 불교가 전래된 한참 이후 신화화하는 과정에 윤색됐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신화나 설화도 나름의 여러 연유에 의해 만들어지고 전승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때가 많을 것이다. 특히 가야사에 대한 기록이 부족해 유적 발굴에 의존하고 있는 상태에서 허황옥과 장유화상은 그 이력의 사실성과 무관하게 불교계와 한·인도 친선 외교 관계에서도 중요한 인물로 주목받고 있다.

예고 없는 짧은 만남이었지만 여운이 있었다. 은하사를 휴대전화 하나 들고 서성거리는 필자에게 노승이 다가와 차 한 잔 마시고 가라 한다. 은하사 회주 ‘서림 대성 대종사’ 스님이었다.

가락고찰 김해 신어산 은하사

은하사로 가는 돌계단 길
은하사로 가는 돌계단 길

은하사(銀河寺)는 경상남도 김해시 신어산(神魚山) 서쪽 자락에 있는 가락국 때 창건한 사찰로 알려진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범어사(梵魚寺) 말사이다. 사찰의 창건 연대는 불분명하지만 설화에 따르면 금관가야의 김수로왕 때 왕후인 허황옥의 오빠 장유화상(長遊和尙, 본명 허보옥)이 창건했다고 해 우리나라 불교 역사를 2000년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신어산(631m)의 옛 이름이 은하산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며, 창건 당시 이름은 서림사(西林寺)였다고 한다. 신어산 동쪽에 장유가 또 다른 사찰 동림사를 동시에 세웠기 때문이란다.

은하사 일주문
은하사 일주문

은하사를 목전에 두고 길 좌측에 동림사 이정표와 일주문이 보인다. 조선 중기 이전까지 있던 건물은 동림사와 함께 임진왜란 때 전소됐고 은하사는 1600년대 중창해 오늘에 이르고, 동림사는 1990년대에 복원한 최근의 사찰이 됐다. 은하사에선 삼국시대 출토된 토기 파편이 발견되기도 했다고 하며 일반인 출입이 제한된 요사채에 ‘서림사’라는 현판을 붙인 전각도 있다. (대성 회주스님의 별호가 ‘서림’이기도 하다.)

은하사 연못 가운데 위치한 관세음보살상
은하사 연못 가운데 위치한 관세음보살상

절 입구에는 ‘나무 관세음보살’이 새겨진 바위 뒤의 조그만 연못 한가운데 관세음보살상이 있다. 쌍어문양이 바닥에 새겨진 반야교를 지나면 각기 다른 크기의 자연석 돌계단이 멋스럽게 펼쳐진다.

은하사 반야교 바닥에 쌍어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은하사 반야교 바닥에 쌍어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일주문 같기도 하고 금강역사가 그려져 있어 사천왕문 같기도 한 대문은 어떤 현판도 없어 이곳이 은하사인지 서림사인지 헷갈려 둘러보게 된다. 은하사는 일주문과 천왕문이 없는 곳이다.

은하사 범종루(왼쪽)와 보제루
은하사 범종루(왼쪽)와 보제루

경사가 있는 산비탈에 있는 은하사 중간 지대엔 이층집의 범종루와 이층집의 보제루가 연계된 마당이 펼쳐진다. 범종루는 다듬어지지 않는 원목 느낌의 16개 아름드리나무 기둥이 2층까지 그대로 이어져 있어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다.

은하사 범종루
은하사 범종루
은하사 범종루
은하사 범종루

박신양 주연의 2001년에 개봉한 영화 ‘달마야 놀자’가 이곳에서 촬영돼 알려지기도 했다. 제각각인 자연석 돌계단과 범종루의 원목 느낌의 나무가 영화 속에서 기억으로 남는다.

은하사 보제루
은하사 보제루

범종루 옆으로 또다시 자연석 돌계단을 오르면 마지막 예불 공간 앞마당이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왼쪽엔 명부전과 삼성각이, 오른쪽엔 응진전과 출입이 제한된 요사채가 있다.

은하사 대웅전 목조관음보살좌상
은하사 대웅전 목조관음보살좌상

조선 중기 이후에 지어진 대웅전에는 특이하게 석가모니불이 아닌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다. 내부에 문화재로 지정된 벽화 32점이 있다고 했는데 보이지 않아 외벽까지 찾고 있다가 회주 스님을 만나게 됐다. 벽화를 떼어내 다른 전각 안에 첩첩이 쌓아 보관하고 있지만 보관 방법에 아쉬움이 있다고 스님은 토로한다.

은하사 명부전 목조지장보살 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은하사 명부전 목조지장보살 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꽃살 무늬가 아름다운 명부전은 죽은 이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곳인데 ‘목조지장보살 삼존상과 시왕상 등’이 보물로 지정됐다. 시왕(十王)은 사후를 관장하는 10명의 지옥 왕인데 우리가 아는 대표적인 시왕이 염라대왕이다.

산신탱, 칠성탱, 독성탱이 있는 삼성각 내 좌측면에 장유화상 진영이 봉안돼 창건 설화를 뒷받침하고 있다. ‘신의 물고기’라는 뜻의 신어산(神魚山)의 신어(神魚)도 쌍어 문양을 뜻하며 수로왕릉 정면에도 두 마리 물고기가 새겨져 있다. 이 문양은 허황옥의 출신지로 기록된 인도의 아유타 국가의 문양으로 인용된다. 웅장한 신어산의 기운이 은하사를 감싸고 있다.

은하사와 대성 회주스님

은하사 정현당. 서림사 현판이 붙어 있다.
은하사 정현당. 서림사 현판이 붙어 있다.

노승을 따라 외부인 출입 금지가 붙은 대문을 지나 은하사 제일 위쪽에 있는 차실로 들어갔다. 올라가는 길에 웅장한 신어산을 배경으로 서림사라는 현판이 붙은 요사채 건물이 있고 차실 앞에는 대웅전 벽화 원본을 보관하는 곳이라는 조그만 전각이 마주하고 있다.

보이차를 큰 사발에 가득 내려 주며 특별한 물로 우려낸 것이니 다 마시고 가란다. 가락국, 장유화상, 은하사에 대해 우리가 잘못 인식하고 있는 역사부터 우리나라 애국가와 국화인 무궁화를 바꿔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시대를 넘나드는 강의를 들었다.

은하사 회주 대성 스님
은하사 회주 대성 스님

듣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지만 일정 때문에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세수 80이 지났다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정정하고 맑은 모습이었다. 말할 때도 젊은이 못지않은 음성이었다.

은하사 회주 대성 스님(왼쪽)과 정용식 ㈜헤럴드 상무
은하사 회주 대성 스님(왼쪽)과 정용식 ㈜헤럴드 상무

‘서림 고사성어집’을 선물로 준다. 스님이 3년여 걸쳐 정리한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그림도 없이 흑백으로 촘촘히 적힌 6000여구의 고사성어가 가나다순으로 정리돼 있는 두꺼운 책이다. 머리말에서 스님은 “오랜 세월 동안 한자 문화권에 살면서 한문의 고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라며 “학문(學問)과 학문(學文)은 미래를 보는 지혜를 길러주는 중요한 일이다”라고 했다. 아마도 필자 관상을 보니 공부 좀 더 해야겠다고 생각해 주셨나 보다. 스님과 짧은 만남이었지만 머리가 아플 정도로 많은 과제를 던져줬다.

은하사 선정당
은하사 선정당

원래 가락국의 최초 사찰이라던 장유사 위치(장유사지)도 따로 있고, 신어산에 장유화상이 머물렀기에 은하사의 역사성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김수로 허황옥의 일곱 왕자의 출가지역은 하동 칠불사가 아닌 경주 남산의 칠불암이라는 이야기 등 기회가 되면 좀 더 많은 이야기를 통해 얼개를 다시 짜봐야겠다는 지킬 수 없는 막연한 생각도 해봤다.

절을 나와 알고 보니 대성 스님은 1972년 은하사 주지 소임을 맡은 후 범어사 주지를 맡은 기간을 제외하곤 오롯이 은하사에서만 머무른 ‘신어산인(神魚山人)이라고 하며 은하사 회주 스님이었다. 오늘은 얼떨결에 뵙고 시간에 쫓겨 큰스님이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엉성하게 들었다.

하지만 다음에 꼭 다시 찾아뵙겠노라고, 그리고 그때는 간식거리라도 들고 오겠노라고 의례적인 인사를 드리고 나와야 했다.

장유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찰?

장유사 경내 전경
장유사 경내 전경

은하사를 취재하기로 하면서 장유화상의 사리탑이 있고 일각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사찰이라고 주장하는 장유사가 은하사에서 자동차로 40여분 거리에 있다고 해 잠시라도 들를 계획을 했었다. 그러나 대성 스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시간도 녹록지 않아 갈까 말까 잠시 고민하기도 했지만 잠시라도 가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다.

장유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장유사는 좁고 구불구불하고 경사도가 만만치 않은 길을 한참 달려서 김해시가 한눈에 들어오는 높은 곳에 있었다.

장유사 사천왕문. 2층은 범종각으로 사용되고 있다.
장유사 사천왕문. 2층은 범종각으로 사용되고 있다.

불교대학 개강을 알리는 플래카드가 걸려있는 사천왕문 이층에는 범종각으로 사용되고 있었고 현대식 전각 몇 동이 전망 좋은 곳에 잘 배치돼 있다. 해발 801m의 신화를 간직한 불모산(佛母山)의 자락이라는 용지봉(745m) 준령에서 흘러내리는 수려한 자연경관이 사찰을 둘러싸고 펼쳐져 있다.

장유사 지장보살상
장유사 지장보살상

입구엔 거대한 황금색 지장보살상이 김해평야를 내려다보고 있다. 대웅전 뒷길로 올라가니 연꽃 모양의 하대석 위에 세워진 2.5m의 소박한 석조팔각 사리탑이 우리나라 최초 불법을 전파했다고 전하는 장유화상 사리탑이라고 안내돼 있다.

장유사 석조팔각 사리탑
장유사 석조팔각 사리탑

가락국 제8대 질지왕이 세웠으나 수많은 전란의 피해로 탑과 유물이 훼손돼 파손된 탑을 다시 복원한 것이다.

가락국 장유화상 기적비
가락국 장유화상 기적비

그 옆에는 가락국 불교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는 ‘가락국 장유화상 기적비’도 있다.

우리나라 불교의 남방 전래설을 입증하는 사찰로, 서기 48년에 인도 아유타국의 태자이자 승려인 장유화상(長遊和尙)이 가락국 김수로왕의 왕후가 허황옥과 함께 이곳에 와서 최초로 창건한 사찰이라고 한다.

장유사 대웅전 앞뜰
장유사 대웅전 앞뜰

퇴락해 있는 사찰을 1980년부터 중창불사를 시작해 현재의 면모를 갖췄다 하니 뒷동산의 사리탑과 기적비를 제외하곤 모두 현대적인 건축물일 수밖에 없다.

장유사 삼성각
장유사 삼성각

대웅전 용마루는 두 마리 용이 누워 있는 듯 이색적인 모습이고, 삼성각 또한 특이한 모습이다.

은하사, 장유사 역사는 여전히 물음표 속에 남겨둘 수밖에 없다.

장유사 전경
장유사 전경

지금은 앞이 훤히 트인 장유사 앞마당에서 기와 담장에 의지해 김해시 풍경을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글·사진 = 정용식 ㈜헤럴드 상무

정리 = 민상식 기자


mss@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