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편 157. 레오니다스 1세
‘300’ 주인공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압도적 병력차 맞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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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 지도자의 결단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테르모필레 협곡에 내리깔린 대기는 시큼한 냄새를 풍겼다.
기원전 480년.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 1세는 절벽에 선 채 공기를 들이마셨다. 역한 기운이 쑥 들어왔다. 이는 소년 때부터 평생을 맡아온 악취, 피비린내였다. 지금 이 땅은 피의 협곡으로 이름을 바꿔도 될 만큼 시신이 즐비했다. 아무렇게나 잘리고 찔린 채 빨갛게 물든 그것은, 계속해 치우고 태워도 산처럼 쌓이기를 반복했다.
아들아. 기억하거라.
전투가 끝나면
방패를 들고 당당히 돌아와야 한다.
그게 안 된다면,
차라리 방패에 실린 채 (죽어서)오길 바란다.
레오니다스는 어머니에게 지겹도록 들은 이 말을 곱씹는 듯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한쪽에는 산, 반대편에는 물을 둔 좁은 땅 위에 있었다. 그는 거기서 생애 마지막 결단을 내리려는 모습이었다.
잘 싸웠지만…우회로 뚫렸다
![Abbott, Jacob, 테르모필레 전투, 1900 [History of Xerxes]](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5/17/news-p.v1.20250516.aa46376c8906437691121af80ea75db3_P1.jpeg)
레오니다스와 스파르타 정예군 300명과 각기 다른 도시 국가에서 온 지원군 7천여 명(통칭 그리스 연합군)은, 이곳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여태 믿기지 않을 만큼 잘 싸웠다.
레오니다스의 그리스 연합군은 앞서 이틀간 벌어진 크세르크세스 1세의 페르시아군 사이 교전 중 기적을 거듭 일궜다.
7만~30만명. 아무리 적게 봐도 10배 이상 병력 차를 가진 상대의 진격에 버티기를 수차례 성공한 것이다. 주전장(主戰場)을 협곡 위 좁은 통로로 놓고, 전면에 정예군을 철통방어 태세로 배치한 병목 전술이 빛을 발한 결과였다.
어쩌면, 페르시아군에 맞서 이길 수 있지도 않을까….
전투 이틀째 오후.
그리스 연합군 중 몇몇은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지금껏 싸움터로 삼은 좁은 통로가 아닌, 그 옆 깎아내릴 듯 높은 산 위에서 땅울림이 느껴지기 전까지는. 이는 기어코 우회로를 찾은 페르시아군이 은밀히 침투하는 소리였다.
“스파르타 300명은 남는다”
레오니다스는 이날 밤, 그리스 연합군의 향후 행보를 논할 군사 회의를 소집했다.
그가 속한 스파르타 정예군의 참모, 아울러 지원군으로 온 각 도시 국가의 장수까지 모두 불러 모았다. “적의 우회 공격에 맞서 싸울 것인가. 그게 아니면 수천의 병력을 이끌고 돌아가 훗날을 도모할 것인가. 그대들에게 선택권을 주겠소.”
레오니다스는 먼저 웅성거리는 지원군 쪽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우리 스파르타 전사 300명은….”
“당연히 싸워야지요.”
레오니다스의 말을 스파르타군 참모가 받아 이어갔다. 정적이 돌았다. 진작부터 퇴각을 계획했던 지원군 측은 뜻밖 상황이 연출되자 짐짓 놀라고 있었다.
스파르타 군인에게는
적이 몇 명인지 중요하지 않소.
오직 그들의
위치만 궁금할 뿐이오.
놈들이 어디서 어떻게 들어올지 안 이상,
다른 건 하나도 신경 쓸 게 없소.
레오니다스 홀로 이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 이렇게 응수했다. 그런 뒤 한 차례 뜸을 들이고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우리 스파르타 병사 300명은 여기에 남겠소.” 이 말은 즉, 여기서 페르시아군에 포위돼 장렬하게 전사하겠다는 얘기였다.
회의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결국 스파르타 정예군 300명과 극소수 도시 국가의 일부 병사만 남기로 뜻을 모았다. 이들을 뺀 나머지 그리스 연합군의 모든 병력은 물러서 후일을 도모하기로 했다.
최후의 결전

그렇게 레오니다스와 소수 병력은 마지막 전투를 준비했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그림 <테르모필레 전투의 레오니다스>를 보면 당시 상황을 더 쉽게 떠올릴 수 있다. 화폭 한가운데 있는 레오니다스는 결연한 표정을 짓는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는 일찌감치 죽음을 각오한 듯 외려 담담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꽉 쥔 칼과 방패에선 그래도 쉽게 물러나지 않겠다는 식의 다짐도 느낄 수 있다.
레오니다스만 그런 자세인가.
월계관을 머리에 쓰고 신발 끈을 묶는 병사, 이를 쓰지 않고 들어 올린 채 노래를 부르는 병사들, 마지막 전투에 앞서 서로를 끌어안는 부자(父子) 등 각자 방식으로 전의를 다지는 중이다. 협곡 사이로는 이들이 지키려고 하는 그리스 도시의 풍경도 볼 수 있다. 나무 뒤 병사 둘이 나팔을 불고 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페르시아의 대군이 기어코 진지 앞까지 도달한 게 분명하다.
이제, 최후 결전이 시작되려고 할 참이었다.
‘300’이 퇴각하지 않은 이유
그런데, 레오니다스와 스파르타 정예군은 왜 죽을 걸 알고도 다른 그리스 연합군처럼 도망을 택하지 않는가. 여기에 대한 의문부터 든다.
그는 퇴각 병력을 위한 엄호, 이에 따른 피해 최소화 등 전략적 판단으로 이러한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스파르타 전사로 뼛속 깊이 박힌 긍지였다.
이제 잠시 과거로 시점을 돌려보려고 한다. 일단 레오니다스의 이야기다.
‘스파르타 교육’의 현장

레오니다스는 기원전 540년 스파르타의 왕자로 태어났다.
다만, 그 위로 형이 두 명 있었기에 왕위를 이어받을 가능성은 낮아보였다. 레오니다스는 일곱 살이 된 해에 아고게(Agoge)에 입소했다. 그곳은 전사를 키운답시고 잔혹한 군사 훈련을 행하던 기관이었다. 보통은 왕자라고 하면 이 과정에서 빠질 수 있었지만, 그는 왕자치고도 서열이 낮아 그럴 수 없었다.
레오니다스는 이때부터 최소 십수년간 이어지는 혹독한 군사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살아남았다.
이는 대단한 일이었다. 아고게는 매 순간 죽을 수 있을 만큼 참담한 시설이었다.
우선 훈련생은 입소 직후 ①신체검사를 받았다. 여기서 문제를 보이면 곧장 절벽에서 굴러떨어져 죽어야 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하루 중 ②군사 수업으로 10시간을 썼다. 검술과 창술, 방패술, 레슬링 등 다양한 전투법을 익히는 때였다. 아울러 철학과 문학, 수학 등 ③학문을 배우는 데 또 6시간을 들였다. 형틀에 묶인 채 채찍질 참기, 한겨울 가시 섞인 풀숲에서 살아남기 등의 ④극한 훈련도 수시로 있었다.
그러다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⑤하루 중 두 끼의 식량은 훔치든, 뭘 죽여서 얻든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졸업 시험은 혼자 창을 들고 산에 올라 야생 동물을 잡아오는 일이었다. 강한 짐승을 잡아올수록 이름값이 높아졌기에, 늑대나 멧돼지와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레오니다스는 이를 다 극복하고 스파르타의 전사에 오른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 맏형(클레오메네스 1세)과 둘째 형(도리에우스) 모두 갑작스럽게 숨지며 예기치 않게 왕위까지 쥘 수 있었다. 그의 자부심이 얼마나 컸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모두가 역전의 전사로

물론, 그와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함께 선 정예병 300명 또한 모두가 아고게를 참고 견딘 역전의 전사들이었다.
정예병들 사이에선 어느덧 설렘의 감정까지 피어나고 있었다. 이들 또한 드디어 전사로서 영광스럽게 죽을 수 있는 곳을 찾았다는 생각이었다. 오늘 분명 죽을 수밖에 없겠지만, 생을 다하기 전 최소 백 명씩의 목은 베고 가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모습이었다.
300+@ vs. 7만~30만, 왜?

그렇다면, 여기서 또 하나 근본적인 궁금증이 생긴다.
애초에 레오니다스의 그리스 연합군은 어쩌다 페르시아 대군과 맞붙을 수밖에 없었는가. 여기에는 양측 사이 얽히고설킨 복잡한 배경이 있었다.
또 한 번 시점을 과거로 돌려보자.
사실, 그리스 땅과 페르시아 땅 사이 대규모 전쟁은 예전에도 있었다.
기원전 490년께. 그러니까 레오니다스가 최후 결전을 준비할 무렵에서 10년을 앞당긴 시점.
페르시아의 당시 지도자였던 다리우스 1세가 2만 5천명 규모(추정)를 끌고 그리스 대륙을 침공한다. 역사에서는 이를 제1차 페르시아 전쟁이라고 칭한다.
당시 다리우스는 명분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그 시절 그리스 도시 국가의 맹주, 아테네를 향한 보복이었다.
다리우스는 이 전쟁을 벌이기에 앞서 자국 내 반란과 마주한 적이 있었다. 갑작스럽게 반기를 든 곳은 페르시아가 영향력을 쥐고 있던 이오니아(소아시아 서부 해안) 지역이었다. 다리우스는 이 사태를 진압하던 중 아테네 등이 이오니아를 은밀히 도왔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군대를 일으킨 것이었다. 뒷배가 돼준 이들을 응징하기 위해서였다.
‘물’과 ‘흙’을 요구한 결과
![M. A. Barth, 스파르타인이 페르시아 사절을 우물에 던지는 모습, 1832 [Vorzeit und Gegenwart]](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5/17/news-p.v1.20250516.b76417083b2543deac6ee3732f39e5df_P1.jpg)
다만, 다리우스는 본격적인 침공에 앞서 모든 그리스 도시 국가에 사절을 파견하는 행보부터 보였다.
그대들의 ‘물’과 ‘흙’을 주시오.
이들은 각 국가 지도자를 만나 이렇게 요청했다. 그곳의 땅과 강, 바다를 모두 내놓으라는 회유이자 협박이었다. 대부분은 이에 고개를 숙였다. 다리우스 당시 페르시아는 세계 최강국 중 한 곳이었기에.
하지만 아테네는 응하지 않았다.
외려 찾아온 사신(使臣)을 재판에 넘기고, 심지어 사형을 선고한다. 정말로 구덩이에 던져 처형(!)까지 한다. 다리우스 입장에선 기가 막히는 적반하장이었다.
이런 가운데, 아테네만큼 자존심 센 스파르타도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 회유를 위해 보낸 사신을 우물에 밀어 넣고 만 것이다. “네놈이 찾는 물과 흙은 그 안에 있으니 찾아가라!”는 말과 함께였다. 다리우스는 이러한 일들에 더더욱 격분했다. 그러니까, 그가 벌인 제1차 페르시아 전쟁은 이에 따른 결과였다.
1차 페르시아전의 실패, 그 다음…
하지만, 다리우스는 그 전쟁을 일으키고도 벼르고 벼른 아테네를 정복하지 못했다.
이후 다리우스는 곧장 설욕을 준비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그의 한을 이어받아 페르시아 왕위에 오른 아들, 그가 바로 크세르크세스 1세였다.
크세르크세스는 즉위와 동시에 아버지 다리우스가 이루지 못한, 그리스 침공의 꿈을 꾼다.
그리고 기원전 481년.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뺀 모든 그리스 도시 국가에 또 한 번 땅과 물을 요구하며 사실상 선전포고를 했다. 제2차 페르시아 전쟁의 시작이었다.
페르시아 입장에서 이번 전쟁은 반드시 이겨야 했다. 그것도 참혹하게 짓밟아야 했다. 상상 이상의 대군을 몰고 온 이유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몇몇 그리스 도시 국가는 합동으로 대책 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특히나 육군이 강한 스파르타가 지상전, 해군을 키우는 데 공을 들인 아테네가 수중전의 주도권을 갖기로 결의했다.
1년 후, 크세르크세스가 직접 대군을 몰고 그리스 땅을 밟았다.
진격을 이어간 이들은 아테네로 향하기 전 관문이자 뜨거운 문(테르모필레의 그리스어 뜻), 테르모필레 협곡까지 온다. 그리고, 여기서 레오니다스의 스파르타 정예병 300명 등 그리스 연합군을 마주하게 된 것이었다.
“무기? 와서 가져가라”
항복하라.
그러면 그대들에게 자유와
‘페르시아인의 친구’라는 호칭,
지금 갖고 있는 땅보다
더 나은 대지를 주리라.
‘관대한’ 크세르크세스는 협곡의 가장 좁은 통로 위 진을 친 그리스 연합군을 구슬렸다.
레오니다스는 이를 거부했다. “그렇다면 무기를 내려놓아라.” 크세르크세스는 다시 사신을 보내 말을 전했다. 이에 대한 레오니다스의 반응은 간결했다. “와서 가져가라.”
그렇게 전면전은 불가피해졌다.
‘300’, 의외의 선전
![존 스티플 데이비스, 테르모필레 전투, 1900, [The story of the greatest nations]](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5/17/news-p.v1.20250516.ab334da11f064c99a3c6d9ea67656c65_P1.jpg)
의외로 레오니다스의 그리스 연합군이 처음 이틀간은 승기를 잡았다.
레오니다스는 그의 300명 전사를 중심으로 협곡 내 좁은 통로를 봉쇄했다. 그대로 창을 세우고, 방패를 올린 채 몸을 바짝 붙였다. 페르시아군은 언젠가부터 가시가 튀어나오는 벽과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페르시아군의 자랑인 기병도, 날렵한 경보병도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크세르크세스는 수많은 병력이 창에 꿰뚫리고, 절벽으로 떨어지는 것을 봤다. 그는 이러한 참혹한 광경을 보고 앉은 자리에서 세 번이나 일어났다고 한다.
‘이모탈’의 등장
초조해진 크세르크세스는 비장의 카드를 쥐었다. 불사 부대, 이모탈에 출격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모탈은 페르시아 내 최고 대우를 받는 왕의 호위병이었다. 규모는 1만명. 한 명이 전투 불능에 빠지면 바로 예비군이 투입되는 구조였다. 불사 부대라는 말은 그런 식으로 어떻게든 1만명을 유지하고 있기에 붙은 별칭이었다. 격투술과 궁술 등에 모두 능한 이들은 페르시아에서는 이례적으로 통일된 복장까지 갖췄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그런 이모탈 또한 협곡 위 철벽을 뚫지 못했다.
당황한 크세르크세스는 전투를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끝없이 교착 상태가 이어지면, 만에 하나 보급이 바닥나면 최악 상황에 놓일 수도 있었다. 이때, 크세르크세스를 찾아온 이가 있었다. 그는 생각지도 못한 뜻밖 손님이었다.
‘악몽’의 시작
제가 협곡의 샛길을 알고 있습죠.
레오니다스가 친
방벽의 뒤를 칠 수 있는 우회로말입죠.
배신자 에피알테스. 왜소한 몸의 사내는 굽신대며 이런 말을 했다. “그대는 왜 동족을 등지려고 하는가.” 크세르크세스는 그런 에피알테스에게 슬쩍 떠보는 말을 했다. 그러자 에피알테스는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저는 돈만 받으면 되는데요?” 그가 당연하다는 듯 내놓은 대답이었다.
이 능글맞은 사내의 말이 맞았다.
정말 샛길이 있었다. 레오니다스도 그 존재를 알고 나름 대비를 해놓기는 했지만, 이곳까지 완벽하게 막아두지는 못했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뒤집혔다. 이제는 레오니다스가 수세에 몰린 형국이었다. 크세르크세스는 당장 날이 밝으면 수만, 수십만 대군을 양면으로 내보낼 수 있었다.
방패에 실려갈 곳을 찾다
![Ward, 죽음을 향해 몸을 던지고자 하는 레오니다스와 그의 동료들, 1881 [The illustrated history of the world]](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5/17/news-p.v1.20250516.56f2c7056dee4e1980a80af158953df2_P1.jpg)
“스파르타 군인에게는 적이 몇 명인지 중요하지 않소. 오직 그들의 위치만 궁금할 뿐이오. (…)”
이제 다시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레오니다스가 그의 300명 결사대와 함께 그대로 남기를 선언한 것이었다. 드디어 방패에 실려 갈 수 있는 곳을 찾았다며.
죽은 王의 목을 또 쳤다
![작자미상, 스파르타와 페르시아 사이 테르모필레 전투, 1832 [Vorzeit und Gegenwart]](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5/17/news-p.v1.20250516.ecc79628af2f44fdbec627a210e3a4bb_P1.jpg)
드디어 결전의 날이었다.
스파르타 전사, 이들과 함께 남은 테베 등 일부 병력은 목숨을 걸고 싸웠다. 거기서 더 나아가 생명을 내놓고 달려들었다.
레오니다스의 그리스 연합군은 빼곡하게 둘러싸인 채 전진했다. 그사이 수많은 페르시아군의 심장을 관통했던 창이 부러졌다. 페르시아군의 목을 꿰뚫은 칼도 휘었으며, 쏟아지던 화살비를 막아준 방패 또한 이가 다 빠졌다. 이들은 이제 돌을 들었다. 돌이 없으면 맨손을 휘둘렀다. 그럴 수도 없게 되면 어금니로 상대편의 정강이를 물어뜯었다.
그럼에도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레오니다스를 포함, 대부분이 숨졌다. 페르시아군은 이미 죽은 레오니다스의 목을 숭덩 벴다. 그렇게 또 한 번 죽여버렸다. 남아있는 몸통은 십자가형에 처하게 했다. 이들이 레오니다스에 대해 얼마나 치를 떨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희생의 ‘가치’
끝으로 레오니다스의 희생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는가.
여기에 대해선 학계에서 의견이 엇갈린다. 크세르크세스의 페르시아군은 테르모필레 협곡 전투 후 거침없이 그리스 땅을 휘저었다. 아테네를 불바다로 만드는 꿈도 드디어 이룰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제2차 페르시아 전쟁의 큰 틀을 볼 때, 대세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 전투였다는 말도 있다.
다만, 이들의 희생이 백 퍼센트 의미가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선 그날 그곳에 남아줬기에 당시 퇴각하던 병력 수천을 살릴 수 있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누군가 시간을 끌지 않고 다 도망쳤다면, 외려 페르시아 기병의 추적을 허용해 허무하게 몰살당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많이’ 생존하고, 이에 사기 또한 높일 수 있었기에 설욕도 준비할 수 있었다는 의견 또한 뒤따른다.
영웅 중 영웅
지나가는 나그네여.
스파르타에 전해주오.
우리는 조국의 명을 받들어
여기에 잠들었다고….
고대 시인 시모니데스는 테르모필레 전투를 되새기며 이런 시를 썼다.
그의 행보가 어떤 득실을 낳았는지에 대한 토론은 여전히 뜨겁지만, 모두가 인정하는 점은 있다. 그가 고대 그리스를 대표하는 영웅 중 영웅이었다는 것. 그리스가 지금도 레오니다스를 가장 위대한 그리스인 가운데 한 명으로 꼽는 이유일 것이다.
<참고자료>
발밑의 세계사, 이동민, 위즈덤하우스
페르시아 전쟁, 톰 홀랜드, 책과함께
yul@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