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경제위기나 금융위기 때는 주식시장이 크게 움직인다. 대부분의 위기가 주로 증시를 구성하는 기업 등 민간 부문의 과잉, 또는 탐욕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런 위기들은 대부분 정부의 개입으로 완화되거나 진정되는 경우가 많다. 주식을 발행하지 않는 정부의 문제로 위기가 발생한다면 어떨까? 국채 가격, 즉 금리에 반영된다. 정부에 문제가 생기면 국채 금리가 오르고 이는 회사채 금리에도 반영돼 가계와 기업 등 민간의 부담으로까지 전파된다.

최근 글로벌 증시 흐름은 그리 나쁘지 않다. 연초 이후 코스피와 독일 DAX, 홍콩H지수는 20%가량 올랐고, 주춤하던 미국과 인도 증시도 상승세로 전환했다. 일본과 대만 증시가 부진하지만 낙폭이 그리 깊지는 않다. 그럼에도 글로벌 경제에 대한 불안은 상당하다.

선진국 장기채권시장 폭락 왜?

미국 독일 영국 일본의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 추이

미국 독일 영국 일본의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 추이

서방의 경제 ‘빅4’인 미국, 일본, 독일, 영국의 국채 수익률(Yield)을 보자. 경기를 반영하는 지표인 10년 만기 물 모두 최근 가파른 상승세다. 채권금리는 가격과 반대다. 금리 급등은 가격 폭락이다. 금리 상승은 발행되는 채권이 이를 인수할 수요보다 많다는 뜻이다. 시장이 발행자의 상환 능력에 의심을 갖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정부 발 위기의 조짐이다.

독일을 제외한 미국과 영국, 일본은 모두 선진국 가운데 재정적자가 가장 많은 곳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 부채비율이 미국은 124%, 일본 253%, 영국 104%, 독일 63%다. 세금을 덜 걷을수록 정부 빚이 많다. OECD 평균 조세부담률은 약 33%인데 미국은 26%, 일본은 31%, 영국은 33%다. 독일은 39%다.

미국은 금융위기와 코로나19 극복 과정에서 막대한 재정을 지출했다. 일본은 30년간의 장기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천문학적 제정을 지출했다. ‘요람부터 무덤까지의’ 나라인 영국은 복지 강화에 재정을 주로 썼다. 재정건전성을 중요시한 독일은 최근 경기 부양을 위해 부채비율 상승을 감수하고 재정지출을 늘리기로 했다. 독일의 재정지출 확대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많지만, 어쨌든 나라 모두 장기국채금리는 뚜렷한 상승세다.

경제가 성장하고 세금이 잘 걷히면 재정흑자로 빚을 줄일 수도 있다. 경제 성장이 시원치 않아 세수는 잘 걷히지 않는데 복지와 국방, 인프라, 친환경 전환 등 돈 쓸 곳만 많다면 상당기간 재정흑자는 기대하기 어렵다. 성장이 부진한데 재정건전성 유지를 위해 필요한 지출을 하지 않는 것도 문제다. 연구개발과 인프라투자는 생산효율을 높여서, 복지 강화는 소비를 자극해 성장률을 끌어올릴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재정지출이 얼마나 세수 확대, 즉 경제성장으로 이어질 지다. 국채 가격은 달리 말해 재정 효율에 대한 평가이기도하다.

최악은 국채 금리 상승으로 이자 부담이 늘어 빚으로 빚을 갚는 상황이다. 2022년 이후 금리가 상승하면서 상당수 선진국들이 이 같은 상황에 처했다. 그리고 이들 국가에 대한 우려는 ‘악순환’(vicious cycle)을 넘어 ‘죽음의 소용돌이’(death spiral)로 표현되고 있다.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다.

일본, 장기침체 이은 고령화가 재정위기로

일본은 장기 경기침체와 고령화가 겹치면서 장기국채  발행이 어려워지고 있다.
일본은 장기 경기침체와 고령화가 겹치면서 장기국채 발행이 어려워지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국가가 일본이다. 일본은 정부 부채비율도 높은데다 고령화가 심각해 만성적인 세수 부족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2014년 소비세율 인상(8%→10%)로 급한 불은 껐지만 GDP 대비 정부 부채비율은 245%에서 250%대로 높아졌다. 고령화로 재정지출을 늘려도 좀처럼 경기가 살아나지 않은 결과다. 미래가 불투명해지면서 만기가 긴 국채 발행이 어려워지고 있다. 근 30년 물 국채 수익률 흐름을 보면 미국과 영국이 5%를, 독일이 3%를 넘었다. 일본은 3%에 육박하며 10년 물보다 더 가파른 상승세다. 10년 물보다 30년 물 인기가 적다는 뜻이다. 길게 빌리는 값이 비싸지면 대신 좀 더 싼 이자로 짧게 꿔야 한다. 만기가 짧게 빌린 돈은 급히 갚아야 해 장기적인 투자에 쓰기 어렵다. 평균 만기(duration)가 짧아지면 현금흐름 부담이 커져 신용도에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일본의 국제신용등급은 우리나라보다 두 단계 낮은 A+(S&P), A1(Moody’s)로 중국,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수준이다. 신용도가 낮아지면 조달금리는 더 높아져 이자부담이 더 커지게 된다. 줄이면 일본은 금리상승을 넘어 만기 축소 국면에까지 진입한 셈이다. 그런데 최근 국제신용등급 강등으로 전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나라가 있다. 바로 미국이다.

미국, 재정적자에도 경제성장 했지만

중앙은행의 기준금리 인하에도 장기채권 금리가 상승하는 것은 발행 주체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중앙은행의 기준금리 인하에도 장기채권 금리가 상승하는 것은 발행 주체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미국은 일본처럼 고령화가 심각하지는 않지만 다른 문제가 있다. 제조업 보다는 금융과 서비스업 중심의 경제구조로 만성적인 무역적자다. 해외로의 지속적인 자금유출이다. 그래도 기축통화국인 덕분에 해외로 나간 달러는 다시 미국으로 유입된다. 주식과 채권 등 자산시장을 통해서다. 특히 미국 국채는 안전자산으로 인기가 높다. 상대적으로 낮은 이자로 발행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특히 금융위기 극복 과정에서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가 국채를 매입했다.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다. 미국 정부는 이렇게 싼 값에 조달한 돈을 적절히 지출해서 금융위기도 극복하고 경기를 부양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물가 관리다. 물가가 오르면 금리가 높아져 국채 발행금리도 동반 상승한다. 코로나19 극복 과정에서 미국은 정부와 연준이 합작해 금융위기 때 보다 더 많은 돈을 풀었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충격(shock)를 받으면서 인플레이션에 불이 붙었다. 연준은 기준금리 인상과 함께 그동안 매입한 국채를 시중에 내다팔았다. 양적긴축(Quantitative Tightening)이다. 금리가 급등했지만 미국 경제는 인공지능(AI) 혁명을 주도하며 글로벌 자금을 빨아들였다. 빅테크의 실적 호조와 자산시장 호황, 소비 호조에 힘입어 2024년에는 선진국 가운데 가장 높은 2.8%의 경제성장을 기록한다. 이 해엔 연준도 기준금리 인하를 시작했고 그에 따라 장기금리도 안정된다. 늘어난 재정적자에 대한 우려는 있었지만 성장동력이 잘 가동되고 있어 미국 국채에 대한 믿음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美 경제 자살골, 트럼프 발작…소탐대실 ‘OBBB’

인플레이션 우려는 단기금리 하락을 제한하고 있다.
인플레이션 우려는 단기금리 하락을 제한하고 있다.

미국 장기국채 금리가 발작한 계기는 트럼프다. 지난 해 대선 때부터 그는 미국의 재정에 큰 부담이 될 공약들을 내놓았다. 관세전쟁에 이어 발표한 ‘OBBB’(One Big Beautiful Bill)가 종합 모음집이다. 압축하면 부자 감세, 복지 축소, 타국 과세 강화가 이 법안의 골자다. 관세 전쟁을 벌인 트럼프의 속셈이 글로벌 제조업 공급망의 미국 중심 재편이라면 이 법을 만든 의도는 다른 나라에서 세금을 더 걷어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려는 데 있다.

법안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게 899조다. 미국 기업에 차별적 제도를 적용한 나라의 기관과 개인이 미국에 투자할 때 추가로 세금을 부과하는 보복세다. 일각에서는 이 조항이 주로 유럽연합(EU)를 겨냥해 파장이 제한적일 것이란 견해를 제시한다. ‘차별’ 여부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미국 마음이어서 견강부회(牽强附會)가 가능하다. 트럼프가 취임과 동시에 관세전쟁을 시작했을 때도 억지 논리를 기존 법령에 적용했다. 보복세 우려로 달러 자산 수요가 위축된다면 이는 가격 하락으로 이어져 달러 자산을 보유한 모든 기관과 개인에 영향을 받는다. 재정은 더 악화되는데 해외투자까지 억압하면 달러 자산의 매력은 지금보다 낮아질 게 뻔하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대외자산은 달러, 즉 미국 국채로 보유하고 있다. 가격이 하락하면 투매로 이어져 폭락을 초래할 수 있는 구조다. 결국 OBBB는 미국은 물론 글로벌 경제 구조를 송두리째 바꿀 수도 있는 법안이다. 시행된다면 그 파장을 정확히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다.

제이미 다이먼 JP모건 회장은 최근 정부 부채 증가로 미국 국채시장에 균열(crack)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레리 핑크 블랙록 최고경영자(CEO)는 미국 경제가 2%대 저성장에 머무르면 재정적자가 국가 전체를 삼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시타델의 켄 그리핀 창업자도 재정적자가 국내총생산(GDP)의 6~7%를 차지하도록 해서는 안된다고 꼬집었다. 불안이 커지자 스콧 베센트 미국 재무장관이 이례적으로 채무불이행 가능성을 일축하는 발언을 내놨다.

재정악화, 파탄은 피해도 저성장 고착화될 가능성 커

재정문제가 가장 심각한 일본의 초장기 국채 발행이 어려워지고 있다.
재정문제가 가장 심각한 일본의 초장기 국채 발행이 어려워지고 있다.

재정 불안은 미국만의 고민이 아니다. 독일 등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도 국가부채가 GDP 보다 많다. 그 동안 복지와 친환경에 재정을 많이 쓴 탓이다. 저성장 탈출과 국방력 강화를 위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예산을 써야 한다. 냉전 이후 선거로 정부를 구성하는 나라가 많아졌다. 국민에 부담을 주는 증세를 실행하기는 어렵다. 선진국 증세 사례는 2014년 일본 외에는 거의 없다.

경제 펀더멘털을 고려할 때 미국이나 일본이 실제 채무불이행(default)에 빠질 가능성은 아주 낮다. 하지만 정치권이 재정건전성 회복을 이루지 못한다면 어려운 경제 상황은 계속 될 수 밖에 없다. 경제성장을 자극하고 국민복지를 지원할 여력이 줄어들면 고금리가 계속돼 정부의 이자지출만 눈덩이처럼 불어날 게 뻔하기 때문이다. 단기간에 강한 충격의 위기가 발생하기 보다는 서서히 저성장과 침체의 늪에 빠지는 경로다.

미국 하원을 통과한 OBBB가 상원에서 얼마나 수정이 될 지가 관건이다. 이미 경제계에서는 심각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채권시장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노력과 함께 미국 상원의 OBBB 법안의 추이를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어 보인다.


kyhong@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