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사치였다.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판이었다. ‘민주화 타령’은 잘난 체하는 지식인들의 거들먹이었고 철없는 학생들의 엉석이었다. 하지만 이 나라 사람들은 오랜 민중봉기의 역사를 통해 저항과 투쟁의 정신을 익혔고, 그것이 언제가는 쟁취해야 할 숙명임을 알고 있었다.
이들은 1960년 3.15부정선거를 4.19혁명으로 막고 대통령 이승만을 물러나게 했다. 계엄령, 위수령, 민주인사 감금, 간첩단 조작, 3선개헌, 유신독재의 18년 대통령 박정희를 선거와 1979년 10월의 부마민주화운동으로 가슴 서늘케 했다.
‘서울의 봄’을 무참히 짓밟은 전두환 친위쿠테타 세력에겐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맞섰다. 군부는 장갑차와 무장한 군인들을 앞세워 국민들을 속이고 겁줬으나, 언제나처럼 한 때였다.
아무 생각도 없는 것처럼 보였던 이 나라 사람들은 1985년 선거혁명을 일으켰다. 가택연금과 망명으로 손발이 묶인 두 야당 지도자 김영삼과 김대중의 민주화추진협의회에 몰표를 몰아주었다. 민추협은 신한민주당 간판을 걸고 2월의 국회의원 선거에 뛰어들었지만 지리멸렬로 보였다. 돈이 없어 제대로 된 선거활동도 하지 못했고 일찌감치 보따리를 싸기도 했다. 뻔한 결과였다.
그러나 말없는 다수가 있었다. 서울, 부산에선 이겼고 대구, 인천은 동수였다. 전두환의 민정당이 700여만표의 87석이었고 민추협의 신민당이 600여만표의 50석이었다. 어찌되든 제1야당은 무난하리라던 어용야당 민한당은 400여만표에 26석이었다. 2명을 뽑는 중선거구제가 아니라 1명만 뽑는 소선거구제였으면 서울은 90%대 압승이었다.
민초들의 민주화 열망과 그 지원을 받은 선명야당이 소리를 높였다. 체육관대통령은 영 마뜩치않았다. 1987년 4월 전두환은 나라가 어수선하다며 호헌조치를 내렸다. 직선제 개헌은 다음에 보자고 했다. 어리석었다. 자신보다 훨씬 현명한 국민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학생들이 쏟아졌고 넥타이 맨 직장인과 여성들까지 가세했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도도한 흐름이었다. 2개월 후 정권은 직선제 개헌을 밝혔고, 대한민국은 비로소 어느 정도 안정적인 민주주의의 길에 올랐다.
하지만 2014년 12월 3일. 대통령 윤석열의 입에서 아득히 잊고 있었던 계엄령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역사를 한참 거스르는 어처구니없는 짓이었으니, 남들처럼 거저 얻은 게 아니라 피와 땀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한 우리 국민 앞엔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 추운 겨울 밤의 여의도에 수십만명이 모여들었다. 격하지만 화염병도 없었고 폭력도 없었다. 응원봉을 흔들며 K-팝 가사를 읊조리는 평화로운 광경이었으나, 바램은 격했고 윤석열의 ‘한겨울 밤의 망상’은 무위로 끝났다. 덕분에 뒷걸음칠 뻔 했던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오히려 한 단계 더 뛰어올랐다.
세계적인 정치석학들이 ‘그러한 대한민국 국민’을 ‘빛의 혁명’이라고 명명하며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 한 나라 국민 전체가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른 건 126년 노벨상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김대중 대통령은 ‘이 영광을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한국인에게 바친다’고 했는데, 정말 실현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떠랴. 우리는 이미 전세계인이 다 알고 있는 ‘평화로운 투쟁 축제’의 본산 아니던가.
이영만 전 대표이사
sooha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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