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두 척의 배(페리선)가 강 위에 떠 있다. 한쪽엔 죄수들이, 다른 쪽엔 평범한 시민들이 타고 있다. 각 배에는 상대를 폭파시킬 수 있는 스위치가 있다. 고담의 악당 조커는 버튼을 먼저 누르는 배의 탑승객들은 살 것이요, 자정까지 어느 쪽도 누르지 않는다면 모두 죽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시민과 죄수는 자기가 살기 위해 한쪽을 몰살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의 선의’를 놓고 배트맨과 벌인 조커의 내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만든 ‘죄수의 딜레마’다.
#2 1945년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손에 쥔 버튼은 가짜이야기(코믹스)의 가상도시(고담)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다. 대규모의 인명을 살상할 ‘진짜’였다. 전쟁을 끝내고 더 많은(수십억명) 인류를 살리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소수(수십만)의 사람들은 희생시켜도 될까. 미국 주도 연합군과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과학들은 ‘인간의 답’을 내렸다. 스위치는 작동했고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잿더미가 됐다.
#3 3000여년 전 신화와 역사가 공존하는 시대, 오랜 전쟁을 끝내고 부하들을 이끌며 귀향하는 오디세우스의 배가 여섯 개의 머리를 가진 괴물(스킬라)과 모든 것을 삼키는 소용돌이(카리브디스) 사이의 좁은 해협을 지난다. 6명을 제물로 바치면 배를 구할 수 있는 스킬라 쪽을 택할 것인가, 모두가 죽을 위험이 큰 카리브디스 쪽으로 도박을 할 것인가. 신화의 시대, 버튼은 ‘예언’이었고, 오디세우스만이 ‘인간의 답’을 할 수 있었다. 놀란 감독 영화에서 오디세우스의 선택은 호메로스의 원작과 다르지 않았지만, 고대 그리스인들과 다르게 현대의 관객들은 그것이 ‘공리주의적 선택’임을 안다. 그리고 ‘공리주의’야말로 오펜하이머에게 신이었을 것이다.
배트맨은 “영웅으로 죽거나, 아니면 오래 살아남아 스스로 악당이 되는 것을 보게 된다”며 스스로 오명을 쓴 ‘어둠의 기사’(다크나이트)로 자처한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영웅으로 명예롭게 죽은 자가 아킬레우스라면, 놀란의 영화에서 ‘오래 살아남아 스스로 악당이 되는 것을 보게 된 자’는 오디세우스이며, 오펜하이머이고, 배트맨이다. 영화 속에서 오펜하이머는 직접 이름을 지은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폭발실험 ‘트리니티 실험’의 섬광이 뉴멕시코의 사막을 뒤덮는 순간, 바가바드기타의 한 구절을 떠올린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계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오디세우스는 “제우스의 법이 무너지는 것이 역병처럼 번지고 있다, 우리의 청동기 시대는 붕괴하고 있다”고 했다. 오디세우스의 간계 ‘트로이 목마’가 청동기 문명의 종말을 재촉했듯, 오펜하이머의 핵은 우리 철기 문명의 최종적인 파괴자가 될 수 있다. 놀란 감독의 영화는 서로를 참조하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며, 특히 ‘오디세이’는 그만의 독자적인 영웅서사, 영웅의 계보학을 완성한다. 신을 제거함으로서 완성되는 신화를 말이다. (이하 ‘오디세이’ 등 주요 영화에 대한 결말과 내용이 포함돼 있을 수 있음)
다크나이트, 오펜하이머, 오디세이…‘거꾸로 쓴’ 놀란의 영웅계보
놀랍게도 놀란의 영웅계보는 미래로부터 현대를 거쳐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점점 더 (묵시록적인) 현실의 땅으로 내려온다. 코믹스(DC·배트맨)에서 시작해 실존인물의 전기를 거쳐 아득한 고대신화에서 하나의 사이클을 마감한다. 굳이 ‘다크나이트’ 시리즈(‘배트맨 비긴스’ ‘다크나이트’ ‘다크나이트 라이즈’)와 ‘오펜하이머’ ‘오디세이’를 묶어 영웅 3부작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놀란이 밝힌대로 ‘오디세이’가 그의 모든 영화·이야기의 ‘원형’이라면, 3명의 영웅은 오디세이에서 출발하고 다시 종합에 이르는 ‘트리니티’(삼위일체)다.
왜 놀란은 이들에게 매혹됐을까. 그 열쇠는 바로 조커의 ‘페리 실험’, 오펜하이머의 ‘핵폭탄’, 오디세우스의 ‘스킬라와 카리브리스’, 즉 본질적으로 동일한 3개의 딜레마에 있지 않을까. ‘페리 실험’은 노골적인 죄수 딜레마의 변형이며, 핵실험과 ‘트로이목마’, 그리고 ‘스킬라와 카리브리스 통과’는 는 공리주의(전쟁을 끝내기 위한 폭력, 전체를 살리기 위한 일부의 희생) 딜레마의 전형이다.
3명의 영웅은 인류(공동체)를 구할 특별한 능력이 있다. 그것은 곧 자신과 인류를 위험 속으로 빠뜨릴 수 있다는 점에선 천형, 신이 내린 벌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들 영웅의 능력은 세상의 질서를 바꾸어 놓고 그것이 모두의 재앙이 된다. 배트맨은 고담을 구하기 위해 법 바깥의 힘을 사용한다. 그런데 조커가 등장하면서 그 힘은 더 거대한 혼돈을 불러온다. 결국 배트맨은 고담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악한의 이름을 선택한다. 오펜하이머의 천재성은 전쟁을 끝내고 세상을 구할 무기를 만들어내지만, 그 성공 때문에 인류는 스스로를 멸망시킬 수 있는 시대를 맞는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목마라는 최고의 지략으로 전쟁을 끝내지만, 그 승리가 영원한 불행의 근원이 된다. 오펜하이머와 오디세우스의 승리는 수많은 이가 희생된 대가였다. 적군 뿐 아니라 무고한 양민이 학살됐으며, 우리편도 죽었다. 오펜하이머와 오디세우스는 전쟁을 끝내고자 했으나 이들로 인해 인류는 영원한 복수와 폭력의 고리 속에 갇히게 됐다. ▷인류(공동체)를 구할 특별한 능력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천재성과 권력에 대한 명징한, 때로 ‘오만한’ 자기인식 ▷그로 인해 돌이킬 수 없도록 바뀐 세상의 질서 ▷인류의 구원과 동시에 찾아온 거대한 재앙 ▷피아(彼我) 구별없는 무참한 살육과 무고한 희생이 이들 영웅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숙명이다.
오디세우스, 죽은 자에 대한 예의와 산 자에 대한 책임…신의 이름으로 일으킨 전쟁과 문명에 대한 회의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오디세이아’)에서도 장례의 윤리는 강조된다. 오디세우스는 저승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만나고, 트로이에서 죽은 전우들의 그림자를 만난다. 매장되지 못한 죽음은 존엄을 얻지 못한 죽음이며 죽은 자에게 마땅한 장례를 치르는 것이 살아 있는 자의 의무라는 인식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익히 공유된 평대로 놀란은 전형적인 ‘영웅의 귀환’ 서사를 죄책감과 트라우마(전쟁후유증·PTSD)에 시달리는 참전군인의 내면과 겹쳐놓으며 전쟁과 문명에 대한 반성적 서사로 재창조한다.
그래서 ‘죽은 자에 대한 예의’는 영화의 핵심적인 주제 중 하나이다. 여기엔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 귀향과정에서 오디세우스가 잃은 동료들 뿐 아니라 오디세우스의 군대가 트로이에서 죽인 사람들, 저승에서 만나는 영혼들까지 모두 포함한다. ‘죽은 자에 대한 예의’는 곧 ‘살아남은 자가 죽은 자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그럴 때 ‘죽은 자(죽음)에 대한 예의’는 ‘산 자(삶)에 대한 책임’에 대한 물음으로 바뀐다. 죽은 자를 기억한다는 것은 산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오디세우스는 죽은 동료들을 잊어버리고 편안하게 귀향할 수 없지만, 죽은 자들만 바라보면서 삶을 포기해선 안된다. 오디세우스는 귀향의 여정 내내 죽은 병사의 시신을 남겨두고 갈 것인가, 재앙을 피해 어서 빨리 귀향길을 재촉할 것인가라는 딜레마에 빠진다. ‘죽은 자를 잊지 말되 죽은 자와 함께 죽지는 말라’.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이에게 가혹한 요구이지만 오디세우스가 산 자들을 위해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길이다. 이로 인해 귀환 여정의 성격은 바뀐다. 그것은 단순히 고향과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는 전쟁영웅의 환향이 아니라 희생자들의 장례를 완수하기 위한 속죄자의 긴 제의 여정이 된다. 죽은 병사의 이름을 부르고 피와 살이 튀는 도륙의 순간을 끊임없이 돌이키며 또 다른 제물을 신에게 바치며 대가를 치러야 하는 고된 항해가 되는 것이다. 트로이 목마 작전 성공을 위해 아군이지만 끝까지 속여 죽게 했던 병사(시논)나 ‘지혜의 여신’ 아테나의 얼굴을 한 트로이의 죽은 소녀(여사제)는 희생의 상징이다. 그리하여 오디세우스의 귀환은 ‘집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인간(의 정체성)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다시 선택하는 것’이다.
‘제우스의 법’이 무너진 시대, 신없는 신화로서 문명비판의 묵시록
호메로스의 원작을 보면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가 아버지의 소식을 듣기 위해 필로스와 스파르타 등 다른 왕국을 찾을 때나, 오디세우스가 귀향을 위해 여러 곳을 방황할 때 주인들은 반드시 손님에게 음식과 술을 대접하고 몸을 깨끗히 씻겨 충분한 휴식을 제공한 연후에야 비로소 신분과 이름, 방문목적을 묻는다. 아무리 초라한 행색의 낯선 이방인이라도 최고의 환대로서 베푸는 것, 그것이 바로 놀란 영화에서 ‘제우스의 법’이라 일컬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전통 ‘환대’(크세니아, xenia)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올림푸스의 신들이 어떤 모습으로 인간 세상에 나타날 지 모르기 때문에 이같은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르면 이방인과 나그네, 손님과 손님을 맞이하는 주인, 탄원하는 자, 맹세를 지키는 자, 공동체의 관습과 신성한 의무를 지키는 자는 제우스가 특별히 보호하는 존재였다. 말하자면 최고신의 이름으로서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규율이 제우스의 법인 것이다. 놀란의 영화에선 주인 오디세우스가 없는 이타카를 유린하는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은 명백히 ‘제우스의 법’을 어기는 자들이었며, 이들을 모조리 죽인 오디세우스의 복수는 제우스가 허한 공동체의 회복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제우스의 법’으로부터 오디세우스 자신 또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귀향 과정에서 범했던 숱한 행적을 차지하고서라도 ‘트로이의 목마’ 계략 자체가 원죄였기 때문이다. ‘신에게 바치는 봉헌물’이자 ‘종전·화해를 위한 선물’로 위장해 결국 트로이를 파괴시킨 목마는 전승을 이끈 탁월한 계략이었으나, 오디세우스가 영화 속에서 자조적으로 토로하듯 ‘신과의 약속, 인간 상호간 신뢰의 위반’이었다.
“제우스의 법이 무너졌다, 청동기 문명은 붕괴되고 있다”는 3000여년전 영웅의 탄식을 21세기 아이맥스 스크린과 돌비 음향으로 재현한 놀란의 의도를 우리는 아주 단순한 수준에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로 상징되는, 상호주의가 무너진 시대. 각자도생과 무한경쟁, 약육강식의 시대. 혐오와 배제, 차별의 시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바로 ‘제우스의 법’이 무너진 이타카, 악한과 영웅을 구별할 수 없는 혼돈의 도시 고담이 아니면 어디일 수 있느냐는 물음이 놀란 영화의 가장 밑바탕에 깔려 있을 것이다. 무지막지한 속도로 달려가는 이 철기문명은 현대의 ‘프로메테우스’ 오펜하이머의 저주를 피할 수 있을까.
기술과 서사의 완전체…극장영화의 귀환
놀란의 ‘오디세이’는 대중영화가 극장에서 제공할 수 있는 거의 완벽한 영화적 체험을 준다. 대규모 자본을 들여 대규모로 개봉하는 대중영화가 갖추어야 할 시청각의 기술적 완성도와 몰입감 높은 이야기, 현대적이고 관객 친화적인 윤리·철학의 미덕을 모두 보여준다. 호메로스 원작과의 공명과 긴장도 놀랍지만, 놀란 감독의 전작 중 특히 ‘다크나이트’ 시리즈, ‘오펜하이머’와의 연결성은 작품을 더욱 풍부하게 한다. 압도적인 타이틀롤의 맷 데이먼은 물론이고 앤 해서웨이, 로버트 패틴슨, 톰 홀란드, 젠데이아 콜먼 등 배우들의 캐스팅과 연기도 어느 하나 흠잡을 데 없다. 특히 젠데이아 콜먼의 활용은 이 영화의 포인트 중 하나다.
무엇보다 신화와 역사가 공존하는 시대에 대한 해석과 영화적 구현은 경이로운 수준이다. 영화 속에서 신이 객관적 실재냐, 등장 인물 내면의 ‘심리적 현현’일 뿐이냐에 대해 놀란은 관객에게 맡겼지만, 그 중간 어디 쯤에서 ‘신을 삭제한 신화’가 시각적으로도 완성된다. 그럼에도 프란시스코 고야의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윌리엄 터너의 ‘율리시스(오디세우스)가 폴리메포스(외눈 괴물)를 조롱하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율리시스와 세이렌’, 오딜롱 르동의 ‘키클롭스’ 등 신화를 소재로 한 회화 명작들을 소환하는 장면들도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특히 엔드 크레딧이 덮고 올라가는, 고전영화를 보듯 무척 고풍스러운 느낌의 마지막 신은 영화의 모든 주제를 압축한, 역대 최고의 엔딩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이것이 극장영화가 쇠락해가는 OTT 전성시대에 관객들이 앞다퉈 영화관으로 몰려가는 이유일 것이다.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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