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폐쇄’ 파주 美캠프 그리브스 기지
‘라이언 일병 구하기’·‘밴드 오브 브라더스’
주역 미 보병 2사단 506연대 주둔지로 유명
‘태양의 후예’·‘남산의 부장들’ K드라마 촬영
韓반환뒤 민통선 유일 역사·문화체험장 변신
볼링장·극장·막사 등 리모델링, 볼거리 많아
“어머니, 전쟁은 왜 하나요” 학도병 편지 숙연
‘하늘길’ 곤돌라 현장 발권하면 당일방문 가능
50여년간 아무나 갈 수 없던 곳이었다. 서늘한 긴장감이 스며 나오던 최전선 미군기지는 이제 봉인을 풀고 낯선 이들을 향해 품을 내어주고 있다. 칼날 같은 긴장감이 흐르던 강물 위로 곤돌라가 가로지르며 단절의 거리를 단숨에 좁힌다.
날 선 기억을 품은 막사들은 무용담을 간직한 노병처럼 세월의 흔적을 안고 있지만, 표정만큼은 한결 너그러웠다.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은 분단의 그늘은 ‘캠프 그리브스’의 서사를 한층 더 극적으로 벼려내는 배경이다.
임진각 평화 곤돌라, 단절의 강을 건너다
비무장지대(DMZ) 남방한계선에서 불과 2㎞ 떨어진 파주시 군내면 백연리. 민간인의 발길이 오래도록 허락되지 않았던 이 땅에는 정전협정 직후인 1953년부터 2004년까지 미 육군 보병 제2사단 506연대가 주둔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배경이 된 바로 그 부대다.
2004년 주한미군 감축 및 재배치에 따라 기지는 문을 닫았고, 전방 방어선은 한국군이 넘겨받았다. 2007년 8월 한국 정부로 반환된 기지는 문화와 예술의 옷을 덧입고 민통선 내 유일한 역사·문화 체험지로 탈바꿈했다.
세월의 질감을 고스란히 간직한 시설의 역사성 덕분에 캠프 그리브스는 K-콘텐츠의 주 무대로도 주목받았다. 드라마 ‘태양의 후예’ 속 우르크 기지를 비롯해 영화 ‘남산의 부장들’, 디즈니+ ‘메이드 인 코리아’ 등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총구를 겨누던 자리에 카메라 렌즈가 향하고, 군인의 감시 대신 관람객의 웃음이 번지는 풍경. 그 극적인 낙차가 세월의 흐름을 깨닫게 한다.
국경 아닌 국경을 넘는 기분
일반인이 캠프 그리브스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통일대교를 건너는 육로는 개별 방문이 불가하며, 20인 이상 단체에 한해 방문 1~2주 전 신원 보증 명단을 제출하고 관할 군부대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
반면 임진각 평화 곤돌라를 이용하면 사전 승인 없이 현장 발권으로 당일 방문이 가능하다. 탑승장에서 이름과 생년월일, 연락처를 기재하는 보안 서약서를 작성하고 신분증을 제시하면 티켓을 받을 수 있다. 여객선을 탈 때 승선신고서를 쓰고 신분증을 확인받는 절차와 다르지 않다. 육로로 가려면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던 민간인출입통제구역(민통선)을 하늘길인 곤돌라를 통해 편히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곤돌라는 최고 58m 상공을 가로질러 민통선 안쪽 DMZ 스테이션으로 향한다. 북으로 향하는 캐빈 오른쪽으로는 1998년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를 몰고 방북했던 통일대교가 뻗어 있고, 왼쪽으로는 한국전쟁으로 끊어진 임진강 독개다리 교각이 스쳐 지난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 위로 묵직한 역사의 무게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모습이 사방에 펼쳐지자 국경을 넘는 듯한 묘한 감각이 든다.
도착지인 DMZ 스테이션에도 볼거리가 많다. 옥상에는 6월 새롭게 선보인 ‘판문점 체험관’이, 바깥 광장에는 실제 기동하던 탱크가 전시돼 있다.
볼링장에 남은 용사의 기억
곤돌라에서 내려 조금 걸어가면 군 주둔 시절 볼링장을 리모델링한 ‘갤러리 그리브스’가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다. 현장을 안내한 경기관광공사 담당자는 “곤돌라 개통 초기에는 보안 문제로 관람이 이곳만 가능했다”며 “이후 개방 구역이 점차 넓어져 지난해 9월부터는 탄약고를 포함해 총 10개동으로 관람 가능 구역이 확대됐다”고 말했다.
갤러리 그리브스 입구에 놓인 낡은 볼링공과 핀 몇 개가, 이곳 역시 평범한 일상이 흐르던 공간이었음을 조용히 알려준다. 이곳은 현재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의 삶과 희생, DMZ와 정전의 역사를 나지막이 들려주는 자리로 바뀌었다.
내부에는 학도병, UN 참전용사, 종군기자, 간호장교 등 전장에 참여했던 이들의 기록과 사진, 편지, 유품이 전시돼 있다. 전쟁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개인이 겪어낸 삶과 희생에 초점을 맞춘 구성이 돋보인다. 발굴된 탄흔 뚫린 철모와 결합한 추모 전시는 참전용사들이 끝내 피우지 못한 삶의 궤적을 전한다.
전시장 중앙에는 한국전쟁 당시 작전 지도가 펼쳐져 있고, 안쪽 공간에는 김일성, 마크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 등의 서명을 담은 정전협정서 사본이 놓여 있다. 이 종이 한장이 수많은 사람의 운명을 갈랐다고 생각하니 사본이라고 해도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전시관 한편에는 6·25전쟁 당시 포항여중 전투에서 16세 나이로 전사한 이우근 학도병의 편지가 전시돼 있다.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놀기 바빴을 나이에 전선으로 내몰렸던 소년의 편지에는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라는 문장이 있다. 그 물음은, 이곳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던져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낡은 막사에 새겨진 시간의 결
기지 안쪽으로 들어서면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지어진 베이지색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반원형 아치를 그리는 ‘퀸셋 막사(Quonset Hut)’는 병영 임시 막사에서 시작해 화생방 훈련장, 교육장, 무기고, 숙소 등 다목적으로 활용됐다. 막사 외부의 녹슨 원통형 유류 탱크는 새로 단장한 공간 속에서도 지나간 시간의 민낯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과거 중대 사무실은 ‘도큐멘타3’ 전시관으로 탈바꿈했다. 작전실과 통신실을 재현한 막사 안에는 옛 보드게임과 미군 사무 집기 등이 전시 중이다. 미군들이 사용하던 벽난로와 가구도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인근의 ‘스튜디오 BEQ’는 과거 미군 부대 부사관 등이 지내던 미국식 복도형 숙소를 리모델링한 시설이다. 경기관광공사 담당자는 “인기 그룹 NCT드림의 정규 1집 앨범 화보 촬영지로도 유명해 팬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다”고 귀띔했다.
이곳의 각 방은 정전협정 이후 파견된 중립국감독위원회(NNSC) 4개국인 스위스·스웨덴·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 등의 기록물로 채워져 있다. 정전 직후 개성 한옥마을과 한복 차림 주민들의 일상을 담은 희귀 사진 등 잊힌 기억을 복원하는 자료들이 눈길을 끈다.
특히 1950년대 번화한 하와이 풍경 옆에 소달구지를 모는 한국 노인의 모습이 나란히 걸려 있어 당시 두 세계의 아득한 격차를 실감케 한다. 동시에, 전후 70여년간 한국이 이뤄낸 놀라운 성장의 궤적 역시 웅변한다.
군사 시설에서 문화 쉼터로 탈바꿈
기지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미군 주둔 시절의 여가 시설과 핵심 군사 거점이 차례로 이어진다.
7월 선보인 ‘더 그리브스(The Greaves)’는 옛 미군 극장 건물을 개조한 홍보전시관이다. 암막 커튼을 걷고 들어서면 필름 프레임 모양의 벽을 따라 기지의 옛 흑백 사진들이 배열돼 있다. 레트로풍 감성이 가득한 공간에서 빔프로젝터를 통해 예전 미군들의 일상을 한 편의 고전 영화처럼 감상할 수 있는 점도 흥미롭다. 강렬한 붉은 배경과 노란 별 모양 조명, 영화 소품 의자가 놓인 포토존은 캠프 그리브스 방문객의 인기 장소가 됐다.
캠프 그리브스 영내에는 은폐된 대형 콘크리트 벙커 두 동이 있다. 과거 파주와 문산 일대 미군 부대에 탄약을 보급하던 핵심 저장고다. 경기관광공사 담당자는 “적의 항공 정찰과 폭격을 피하기 위해 산 능선을 따라 파고들어 상부에 흙을 덮고 위장한 구조”라면서 “내부 벽체는 두꺼운 콘크리트로 지어 포격에 견디도록 설계됐으며, 현재도 비상시 공식 ‘주민·관람객 대피소’로 지정돼 있다”고 말했다.
현재 두 벙커는 문화예술 전시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탄약고 1관에서는 이승근 작가의 미디어아트 ‘이 선을 넘지 마시오’가, 탄약고 2관에는 연진영 작가의 설치미술 ‘주름진 서식지’가 자리한다. 단절과 대립의 상징이었던 탄약고 안에 마련된 이들 전시는, 전쟁 기지에서 평화·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한 캠프 그리브스의 정체성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탄약고 인근, 한때 군용차들이 드나들던 정비고는 관람객들이 쉬어가는 ‘카페 그리브스’가 됐다. 팝아트 형태의 감각적인 미술 작품, 귀여운 조형물 등이 색다른 느낌을 선사하는 곳이다. 탁 트인 층고는 마음까지 시원하게 해준다.
카페 밖 언덕길을 따라 이어지는 평화 정원에는 가을 개화를 준비하는 구절초 군락이 초록빛 잎을 넓혀가고 있었다.
기지 내 시설은 과거의 긴장을 박제한 유물에 머물지 않았다. 반세기 넘게 얼어 있던 군사 기지는 사람과 예술의 온기로 녹아내렸다. 분단과 대립의 공간은 역설적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평화로운 일상의 소중한 가치를 일깨우면서, 미래를 향한 평화의 이정표가 되어주고 있었다.
파주=김명상 기자
terr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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