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광우 기자] ‘FREE(무료 나눔)’
지난 31일 서울 지하철 2호선 이대역. 대학가로 이어지는 출구 한 쪽에 정체불명의 종이상자가 놓여 있다. 물건이 가득한 상자에는, 무료 나눔을 뜻하는 ‘FREE’라는 글자가 크게 적혀 있었다.
상자에 든 물건의 정체는 한 유명 아이돌 그룹의 앨범 수십장. 심지어 포장 비닐로 뜯지 않은 새 상품이었다. 올해 출시된 해당 앨범 가격은 2만원 수준. 이를 고려하면 상자 하나의 가격만 100만원에 달했다.
언뜻 생각하면 ‘착한 나눔’의 현장. 하지만 실상은 케이팝 산업의 어두운 면을 담고 있었다. 오로지 팬사인회 등 확률형 이벤트 당첨을 위해 수십장을 구매한 뒤, 그대로 버리는 것. 구매 수량만큼 응모 기회가 늘어나는 구조 때문이다.
일부 가수들에 한정된 얘기가 아니다. 서울 이대역 주변에서만 해도 ‘나눔’을 빙자한 쓰레기 투기 현장이 자주 목격되고 있다. 버려지는 앨범의 가수나 기획사도 하나에 한정돼 있지 않다.
현재 1년에 판매되는 K팝 앨범만 1억장 상당. K팝 시장 전반에 이런 실물 앨범 시스템이 구축된 것을 고려하면, 특별히 쓰이지 않은 채 버려지는 앨범의 양도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이날 지하철역에서 발견된 K팝 그룹 앨범의 경우 지난 5월 한 음반 판매처에서 구매할 경우, ‘대면 팬사인회 응모권 1매’를 함께 제공했다. 영상통화 이벤트도 마찬가지였다. 앨범 1장에다 원하는 멤버의 영상통화 응모권 1장이 하나의 상품으로 구성돼 있었다.
이처럼 K팝 앨범의 경우 많이 구입하면 그만큼 당첨 확률이 늘어나는 구조를 흔히 가지고 있다. 좋아하는 가수를 만나고 싶은 팬의 경우, 같은 앨범을 여러 개 살 이유가 생기는 셈. 한 번도 사용되지 못한 ‘앨범 쓰레기’가 무더기로 버려지는 사례가 생기는 이유다.
단순히 팬 사인회 응모만 있는 게 아니다. 특전으로 제공되는 랜덤 ‘포토카드’ 또한 앨범 사재기를 부추긴다. 예컨대 5가지 버전 포토카드 중 하나가 앨범에 포함된 식. 좋아하는 멤버의 포토카드를 갖고 싶거나, 여러 종류를 다 모으려면 앨범을 여러 개 사야 하는 셈이다.
한국소비자원이 지난 2023년 최근 2년간 유료 팬덤 활동을 경험한 만 14세 이상 소비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음반 구매 경험자 가운데 52.7%는 ‘굿즈 수집’, 25.4%는 ‘이벤트 응모’를 앨범 구매 이유로 꼽았다. 음악을 들을 때 이용한다는 답은 5.7%였다.
이벤트에 응모하기 위해 같은 음반을 구매한 사람은 평균 6.7장을 샀다. 조사에서 확인된 최대 구매량은 80장이었다. 랜덤 굿즈를 얻으려고 같은 음반을 산 경우에도 평균 4.1장, 최대 90장을 구매했다.
음악을 좋아해 앨범을 사는 문화가 사라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똑같은 음악이 담긴 실물 앨범을 여러 장 구매하게 만드는 ‘또 다른 이유’들이 K팝 시장에 자리 잡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게 팔리는 앨범의 규모도 작지 않다. 심지어 최근 10년간 10배가량 빠르게 늘어나는 추세다. 써클차트가 지난달 공개한 ‘2026년 상반기 리뷰’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앨범차트 TOP400 판매량은 약 5300만장에 달했다. 전년 동기보다 약 1052만장, 24.8% 증가한 수준이다.
앨범 판매량이 커질수록 함께 늘어나는 게 있다. 바로 ‘플라스틱 쓰레기’. 2024년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이용우 의원이 한국콘텐츠진흥원과 환경부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K팝 앨범의 플라스틱 발생량이 4년 새 8.3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추산됐다. 2023년 판매된 음반을 기준으로 CD만 따져도 1983톤 이상의 플라스틱이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됐다.
CD는 플라스틱 분리수거함에 넣는다고 간단히 다시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CD의 경우 폴리카보네이트(PC)라는 플라스틱으로 이뤄져 있다. 분리해서 재활용은 할 수 있다. 다만 아울러 얇은 금속층, 종이로 만든 라벨 등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어, 경제적으로 회수가 쉽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CD 외에도 앨범에 포함된 화려한 포장지와 사진, 코팅 종이 등도 골칫거리다. 재질별로 재활용 방법이 다른 데다, 애초 일반적인 종이·플라스틱 분리배출 방식으로 처리하기 어려운 소재도 섞여 있기 때문이다.
정부 규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현행 자원재활용법은 재활용이 어렵고 폐기물 관리에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플라스틱 제품 등에 ‘폐기물부담금’을 부과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연간 플라스틱 사용량이 10톤 이하인 업체는 이를 내지 않아도 된다. 이에 다수 음반업체가 부담금을 면제받고 있다.
물론 업계 자체적으로 변화가 있다. 최근에는 실물 CD를 빼고 QR코드나 애플리케이션 등을 통해 음악을 듣는 ‘플랫폼 앨범’이 차츰 늘고 있다. 써클차트에 따르면 전체 TOP400 앨범 판매량 중 플랫폼 앨범 비중은 2024년 13.9%에서 2025년 16.2%로 커졌다.
하지만 팬들 사이에서는 단순히 CD를 줄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같은 앨범을 여러 장 사게 만드는 판매 방식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K팝 팬들이 만든 기후행동 플랫폼 케이팝포플래닛이 2024년 8월 전 세계 팬 약 1만2000명을 대상으로 진행 자체 투표에서도 ‘팬사인회 응모 방식’이 가장 문제가 큰 앨범 상술로 꼽혔다. 랜덤 포토카드와 앨범 버전 늘리기가 뒤를 이었다.
실제 팬들 사이에서도 판매 방식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요구가 이어지고 있다. 기후행동 플랫폼 케이팝포플래닛은 지난해 3월 HYBE·JYP·SM·YG 등 국내 주요 엔터테인먼트사에 공개서한을 보내 팬사인회 응모, 랜덤 포토카드, 여러 버전의 앨범 발매 등 중복 구매를 유도하는 마케팅을 줄여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아울러 ‘플라스틱 앨범의 죄악’ 캠페인을 통해 각 기획사가 앨범과 관련해 발생하는 폐기물 규모를 공개하고 구체적인 감축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케이팝포플래닛은 “엔터사는 팬들에게 앨범을 최대한 많이 팔기 위해 랜덤 포토카드, 커버 종류 늘리기, 팬사인회 응모 등 중복 구매를 조장하고 있다”며 “응원하는 마음을 이용당하는 것도 모자라, 앨범 쓰레기까지 떠안고 있다”고 강조했다.
wo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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