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마르크 앙드레 아믈랭

지난 12~13일 국립심포니 첫 협연

“어려워서 아니라 좋은 곡이라 쳐”

유튜브 실황 동영상 522만회 조회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와 협연 무대를 선보인 피아니스트 마르크 앙드레 아믈랭. 그가 한국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춘 건 이번이 처음이다.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와 협연 무대를 선보인 피아니스트 마르크 앙드레 아믈랭. 그가 한국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춘 건 이번이 처음이다.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초가을의 문턱이었지만, 어쩐지 만추의 한가운데로 온 듯했다. 나지막하고 고결한 호른의 선율에 피아노의 그윽한 물결이 포개지자 객석의 공기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한 음 한 음 흩어지던 건반은 오케스트라의 울림 속으로 스미다가 다시 피아노 한 대의 목소리로 온전히 돌아온다. 깊지만 무겁지 않고, 격정적이나 거칠지 않다. 옹골차면서도 뭉근한 음형은 때론 아릿하고, 때론 호젓했다. 그러다 끝내는 해사한 얼굴을 내밀었다.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 첫 타건이 울리자 투명한 공간감이 공연장의 허공을 가득 메웠다. 시작과 동시에 아쉬움이 찾아왔다. 결 따라 번져가는 미세한 잔향이 다음 음표들에 밀려나고 있어서다. 뒷걸음치는 마음이 잔상을 남길 새도 없이 수정체처럼 벼려진 아티큘레이션이 88개의 건반을 오간다. 웅장한 관현악을 조형해 내면서도 현악, 목관과의 내밀한 교감으로 독주 악기로서 고결한 품격이 드러난다. 수년 전 “사전에 존재하는 모든 형용사를 건반 위에 구현하고 싶다”고 했던 거장의 오랜 예술적 지향이 이날 브람스 안에서 명징한 어휘로 발현됐다.

‘우아한 유령’ 311만 회, 로베르트 슈만 ‘숲의 정경’ 96만 회, 프란츠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제21번’ 52만 회, 모리스 라벨 ‘밤의 가스파르’ 35만 회, 클로드 드뷔시‘영상 1권-물의 반영’ 28만 회….

총조회수 522만 회. 거장 피아니스트 마르크-앙드레 아믈랭(65)이 2024년 내한 독주회 당시 남긴 실황 영상들의 유튜브 누적 기록이다. 당시 클래식 애호가들 사이에서 ‘2024년 최고의 공연’ 중 하나로 꼽히며 불과 2년 만에 이례적인 숫자를 달성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정반대의 음악적 수사도 따라온다. 유튜브에서의 견고한 대중적 지표와 달리 건반 위 ‘난공불락(難攻不落)’의 곡들을 수월하게 함락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아믈랭은 ‘초절기교의 화신’, ‘난곡 스페셜리스트’로 불린다. 클래식 애호가 사이에서조차 ‘어려운 곡’, ‘낯선 곡’만 골라 연주하는 학구파라는 선입견도 존재한다. 샤를 발랑탱 알캉, 레오폴드 고도프스키, 카이호스루 샤푸르지 소랍지 등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시험하는 극한의 레퍼토리를 건반 위에서 결점 없이 형상화해 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아믈랭은 그러나 이 같은 상찬과 선입견에 담담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피아니스트 마르크 앙드레 아믈랭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피아니스트 마르크 앙드레 아믈랭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제가 그 곡들을 치는 이유는 단 하나예요. 좋은 음악이기 때문이죠. 전 이 작품들이 그렇게까지 어렵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해요. 저 역시 다른 연주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곡을 배우고 체화하기 위해 오랜 시간 피나는 노력을 쏟아부어야 했으니까요.”

그가 2년 만에 한국을 다시 찾았다. 아믈랭은 로베르토 아바도 예술감독이 이끄는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와 첫 호흡을 맞췄다. 세계적 명성을 지닌 거장이 국내 교향악단과 협연 무대를 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공연 실황은 오는 11월 13일 글로벌 클래식 플랫폼인 도이치 그라모폰의 ‘DG 스테이지+’를 통해서도 전 세계에 공개된다. DG스테이지를 통해 국내 교향악단 무대가 공개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공연 전 두 차례의 리허설을 마치고 헤럴드경제와 만난 마르크 앙드레 아믈랭은 “즐겁고 생산적인 만남이었다. 단원들이 무엇을 요청하든 기꺼이 조율하려는 유연한 태도와 긴밀하고 조화로운 호흡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며 “올해가 취임 첫해인데 마에스트로와 오케스트라가 아주 잘 맞아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기대된다”고 신뢰를 표했다.

그가 국립심포니와의 협연에서 들려준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은 독일 낭만주의의 기념비적 걸작이다. 아믈랭은 “2번 협주곡은 연주해 온 지 어느덧 40년 가까이 됐다”며 “내 음악 여정에서 가장 오래된 벗이자 ‘좋은 친구’라 오케스트라에 가능한 한 자주 제안하는 곡”이라고 귀띔했다.

그에게 ‘좋은 친구’는 오래도록 함께 한 ‘시간의 길이’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 시간을 통해 얻은 연주자로서 ‘궁극의 해방’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

“사실 청년 시절 이 곡을 처음 무대에 올렸을 땐, 무얼 하고 있는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건반을 눌렀어요. 두 손 모두 피아니스틱한 차원에서 어려운 작품이니까요. 긴 세월을 통과하며 오랜 시간 사귀다 보니, 이젠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순수한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됐어요.”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와 협연 무대를 선보인 피아니스트 마르크 앙드레 아믈랭.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와 협연 무대를 선보인 피아니스트 마르크 앙드레 아믈랭.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8.2만개 악보 뒤지는 탐험가…‘월광’도 처음 듣는 곡처럼”

아믈랭에게 따라오는 첫 수식어는 ‘난곡의 탐험가’다. 그는 수십 년간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찾아 수면 위에 올렸다. 그가 발견한 악보의 세계는 끝이 없다. 아믈랭은 “친구가 보유한 희귀 악보 PDF만 약 8만2000개에 이르고 지금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며 “낯선 음악을 발견하는 일 자체가 즐거움”이라고 했다.

프레더릭 제프스키의 저항 가요 변주곡 ‘단결한 민중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를 음반화했던 궤적이나, 최근 독일 후줌 페스티벌에서 얼 와일드 편곡의 조지 거슈윈 에튀드 전곡을 앙코르로 쏟아낸 일화 역시 같은 맥락이다. 제프스키의 곡에 대해 그는 “사회 운동가였던 적은 없지만 음악에 담긴 민중의 정서와 연대감은 깊이 공감한다”면서도 “피아니스트로서 나의 사명은 정치적 구호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곡의 정신에 온전히 부합하도록 음악적 설득력을 극대화하는 데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그는 정작 자신과같은 ‘발굴자의 행로’는 “누구에게도 권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전 세계 공연장이 유명곡 중심의 레퍼토리를 짤 수밖에 없는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공연장을 찾는 상당수 관객은 자신이 모르는 낯선 곡에 티켓값을 지불하길 두려워해요. 아무리 음악이 훌륭하고 다가가기 쉬워도, 모르는 곡이면 실망할까 봐 두려워 연주회장에 오지 않죠. 그렇다고 익숙한 명곡을 고르면, 다른 피아니스트들과 비교당하는 함정에 빠집니다. 다행히 최근 낯선 레퍼토리에 과감히 도전해 성과를 내는 젊은 연주자들이 늘고 있어 좋은 흐름의 시작이길 기대합니다.”

잘 알려진 명곡과 숨겨진 보석을 대하는 그의 태도엔 어떤 차등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건반 위에서 추구하는 최우선 가치는 오로지 ‘음악의 본질’과 ‘메시지의 본질’을 가감 없이 전하는 명료함이다. 그는 “잘 알려진 곡이든, 알려지지 않은 곡이든 연주할 때는 본질적으로 접근법이 같다”고 강조한다.

피아니스트 마르크 앙드레 아믈랭.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피아니스트 마르크 앙드레 아믈랭.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잘 알려진 곡에선 관객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면모를 마주하도록 하고, 낯선 곡에서는 순수한 발견의 기쁨을 선사하려고 애쓰죠. 설령 그것이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일지라도 관객들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처럼 연주하려고 해요.”

‘익숙함’이란 껍데기를 깨고 ‘낯섦’을 길어 올릴 때 그는 청중과의 순수한 음악적 교감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아믈랭은 “연주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음악의 본질, 메시지의 본질을 왜곡 없이 전달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번 공연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브람스 음악의 정수를 전하겠다”고 했는데, 실제로 객석에선 미처 몰랐던 저마다의 브람스가 샘물처럼 솟아나는 듯 보였다.

“피아노 앞에서만 연습?… 24시간 내내 한다”

거장 피아니스트의 흥미로운 반전은 ‘연습량’이다. 아믈랭은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짧은’ 연주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자신도 “실제 피아노 연습을 하는 시간을 알면 깜짝 놀랄 정도”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그에게 연습은 비단 연주 행위 자체만 의미하진 않는다. 건반 앞을 벗어나 일상 속 사유의 공간에서 머무는 모든 순간이 연습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사실 전 24시간 내내 연습해요. 최고의 아이디어들은 산책 중에 떠오르죠. 물리적으로 소리를 내지 않고도 음악을 순수하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에요. 걸으면서 몸에 자극을 주고 혈액순환을 시키면 템포가 안정되고, 음표 이면에 숨은 건축적 짜임새가 훨씬 선명하게 들려요.”

중요한 것은 연습 시간이 아니라 연습의 질이다. 그는 “하루에 몇 시간 연습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며 “오늘 여덟 시간을 채웠다는 숫자보다, ‘어제 풀지 못한 한 대목의 해결책을 찾았다’는 성취감이 하루를 마칠 때 큰 만족감을 준다”고 귀띔했다.

피아니스트 마르크 앙드레 아믈랭.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피아니스트 마르크 앙드레 아믈랭.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아믈랭의 앙코르는 매번 화제가 된다. 310만 조회수를 기록한 ‘우아한 유령’ 역시 2024년 내한 당시 세 번째 앙코르로 고른 곡이었다. 아믈랭은 “놀라실 수도 있지만, 어떨 때는 피아노 의자에 앉는 그 순간까지도 무엇을 칠지 모를 때가 있다”며 “결국 관객의 반응과 호흡을 보고 판단해야 하는 문제”라고 털어놓았다.

그의 말처럼 이번 내한 여정은 객석과의 교감에 따라 매 순간 다른 빛깔을 띠었다. 앞서 지난 12일 열린 고양 공연에선 무려 세 곡의 앙코르를 쏟아내며 지칠 줄 모르는 ‘건반 위의 마술’을 보여줬고, 서울 무대에선 단 한 곡의 앙코르로 객석을 깊은 사색과 황홀경으로 이끌었다.

그는 “무엇을 들려드리든 한국 관객은 최대한 열린 마음으로 받아주실 거라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며 “한국 관객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고, 가장 높은 집중력을 지녔으며, 섬세하게 반응하는 관객 중 하나”라고 말했다. 당시 그의 선택은 프란츠 리스트가 쇼팽의 가곡을 건반으로 옮겨낸 ‘17개의 폴란드 가곡’ 중 제12곡 ‘나의 기쁨’이었다.

쇼팽의 낭만을 리스트의 피아니즘으로 되살린 앙코르는 악보 위의 탐험가인 아믈랭의 뿌리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누구도 정복하지 않은 난곡을 건져 올리면서도 독일 정통 레퍼토리에 조예가 깊은 그는 결정적일 때면 늘 망설임 없이 ‘과거의 지층’을 열어 보인다. 특히 연주자이면서 작곡가인 그에겐 정통 클래식의 DNA가 깊숙이 새겨져 있다.

“지금의 음악가들은 과거의 음악에 아주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경우에 직접 언급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엔 음악에서 분명히 드러나죠. 저도 과거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고, 자작곡들은 좀 더 전통적인 음악에 대한 오마주와 닿아 있어요.”

그가 미지의 곡을 발굴하는 것은 위대한 거장들이 남긴 유산의 영토를 복원하는 또 하나의 과정이다. 장장 60분의 대장정을 마친 무대엔 아믈랭과 40년 지기 벗이 나눈 투명하고 명료한 대화가 남겨졌다. 수많은 악보 속에서 그가 선택하는 곡들의 기준은 선명한 북극성을 따른다.

“우선 저 자신을 감동시켜야 해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곡이 관객도 감동하게 할 거라는 확신이 들어야 한다는 거예요. 거기에서 시작되는 거죠.”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