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닐라(필리핀)=문재연 기자]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수석대표로 참석한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는 한국외교의 한계와 과제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강 장관은 미국과의 공조 속에서 아세안(ASEANㆍ동남아국가연합) 10개국의 이례적인 대북규탄성명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뒀다. 남측과 북측의 입장을 동등하게 반영해온 아세안 국가에서 이같은 공동성명을 도출시킨 것은 높게 평가받아 마땅하다. 적어도 강 장관은 지난 2008년과 2009년 ARF 때처럼 의장성명 초안이나 최종안에 북한의 입장이 적극반영돼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이번 성과는 ‘미국’의 도움없이는 불가능했다. 북핵문제가 ARF의 주요의제로 떠올랐지만, 담론을 주도하는 건 미국과 중국이었다. 주변 4강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상태에서 ‘주도적 외교’의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강 장관은 신 정부의 외교지평확대를 위해 출장길에 올랐지만, 이 마저도 주변 4강의 힘을 필요로 한 것이 한국외교의 오늘이었다.
대북 압박은 미국이 주도했다. 렉스 틸러슨 미 국무부 장관은 ARF 개최 수개월 전부터 아세안을 오가며 대북제재 및 압박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우리 정부도 아세안 국가들을 적극 설득했지만, ‘항행의 자유’ 작전을 토대로 아세안 주요국가들의 영유권을 지원해주고 있는 미국의 정치력이 지배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강 장관은 틸러슨 장관과의 외교장관회담에서도 문재인 대통령의 남북대화 제안을 설명하며 미국의 대북정책에 ‘보조적(complimentary)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다.
대(對)북 대화의 주도권은 중국에 있었다. 리용호 북한 외무상은 강 장관의 대화제안을 “진정성이 보이지 않는다”며 매몰차게 거절했지만, 왕이 중국 외교부장에게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회담에 나섰다.대북제재 이행 및 북한 태도변화의 카드를 쥐고 있는 왕 부장은 지난 6일 열린 한중회담에서 강 장관에게 문 대통령의 사드(THAADㆍ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추가발사대 4기 배치결정이 한중관계에 “찬물을 끼얹었다”며 압박했다.
이번 ARF에서 한국 외교의 현실을 직시한 강 장관은 한국 외교지평을 다변화하고 정치력을 강화하는 데 힘써야 한다. 우리 정부가 주도적으로 북한을 압박함으로서 대화기조를 마련하려면 그만한 외교력이 뒷받침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강 장관은 각 상대국가에 대한 정보와 지역의 특성, 그리고 수요를 충분히 숙지하고 우리 이해관계와 조정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강 장관은 이번 아세안 10개국들과의 양자회담 모두발언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아세안 국가와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밝혔다”, “양국관계를 강화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원론적인 발언만 반복했다.
누구든 상대방이 평소에 관심이 없다가 필요에 의해 지지와 협조를 요구하면 거부감이 든다. 이번 ARF 회의에서 우리는 북측에 대화를 촉구하고, 아세안 10개국들의 대북제재 지지를 호소했다. 하지만 우리가 북측과 아세안 10개국들에게 발휘할 수 있는 영향력을 과시하거나 제공할 수 있는 정치적 이점을 보여주지 못했다. 우리도 ‘호소’만 하지 않고 저들의 ‘호소’를 이끌어낼 수 있는 지략을 발휘해야 한다. 그래야만 주도적 외교의 포문이 열린다.
munja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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