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문한다. 난 지금 행복한가. 출근길이 설레나. ‘돈은 따라올 뿐’이란 말이 왜 있는지 체감할 만큼 일 하는 게 즐거운가. 생각한다. 출근길 집을 나설 때부터 받는 스트레스. 등굣길도 그랬다. 직장서 받는 스트레스가 업무와 상사라면, 학교가 주는 스트레스는 공부와 선생이었다. 직장인이 되어 외치는 ‘회사 가기 싫어’는 사실, 꼬꼬마 학창시절부터 입버릇이 됐다. ‘학교가기 싫어’다. 단어 하나 바뀌었을 뿐이다. 뭔가 잘못된 것 아닐까.
문득 궁금해졌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일까. 한국 밖에서 사는 직장인은 어.떻.게 자랐을까. 저 사진에 담긴 우리처럼 컸을까.
덴마크→덴마크 국제학교→덴마크 기업 레고의 국제학교 덴마크로 날아간 이유. 간단했다. 납득할 데이터가 많았다. 유엔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가 낸 나라별 행복지수 1위(2017년 2위). 의료비 0원. 아프면 출근하지 말아야 한다. 연 120일까지 가능(비정규직 동일). 아이가 아픈 첫 날도 쉴 수 있다. 직장인 행복지수가 세계 1위(스웨덴Universum 조사)인 이유다.
일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나라의 ‘국제학교’를 골랐다. 정확히 말하면, 덴마크 내 외국인이 주류인 교육기관을 가보고 싶었다. 토종 교육을 받은 아이 뿐 아니라 이방인 학생도 ‘행복한 직장인’으로 클 수 있는지 궁금했다. 객관적 시각을 한층 담보할 요량도 있었다.
국제학교 중 빌룬국제학교(ISBㆍInternational School of Billund)를 택한 이유도 있다. 덴마크 대표기업 레고(LEGO)의 재단이 후원한 학교라서다. 레고 창업자 3세이자 최대주주 키엘 키르크 크리스텐센의 생각이 2년여 만에 맺은 결실이다.
그는 2013년 개교 당시 “(이 학교가) 아이들이 놀면서 배우는(Playful Learning) 데 최적화 한 곳이 됐으면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3세∼16세까지. 알아서 놀고, 알아서 배운다.
빌룬은 수도 쾨벤하운(코펜하겐)서 차로 3시간 넘는 거리다. 학교 주변은 조용한 마을이었다. 아이들 뛰노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찾기 힘들 뻔 했다. 공기는 한국보단 확실히 맑았다. 마음껏 숨 쉴 수 있어 좋았다. ISB 커뮤니케이션매니저 옌센(Jensen) 씨가 기자를 안내했다. 입구 접견실에 있던 사진 액자가 시선을 끈다. ‘Play. Learn.’ 3세 유아부터 16세 청소년까지 한데모인 학교. 아이들은 수업 중이라고 했다. 한국처럼 조용할 줄 알았다. 그러나 조용하지 않았다. ISB엔 국어ㆍ수학ㆍ영어ㆍ사회 따윈 없다. 대신, 각자 관심사로 나눈 ‘프로젝트’가 있다.
골판지로 만들었을 법한 집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알록달록 색깔도 갖가지. 장식물은 덤이다. 옌센은 “커뮤니티(Community)란 주제로 만들었다. 학생들이 각자 스스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각 작품 앞엔 ‘Nyna’ㆍ‘Conrad’ 등 이름이 보인다. “집입니다”ㆍ“빌룬의 레고입니다”ㆍ“도서관입니다. 여기선 시끄럽게 떠들면 안돼요” 등 소개도 다채롭다.
몇 살 아이들의 작품일까. 물어봤다.
Q:(만들고 이름 지은) 학생들 연령이?
옌센:5세다.
한국 나이로 치면 6세다. 이 아이들이, 스스로 만든 작품 속에 자기 생각과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연령이 올라갈 수록 학생들 생각은 한층 정교해졌다. 레고로 만든 작품도 보였다.
옌센:7세 반 아이들이 환경을 주제로 만든 작품이다. 스스로 제안한 환경문제 해결방법도 적혀있다.
설명대로 학생들이 손수 적은 글씨를 읽어본다. “나무를 더 많이 심자”ㆍ“쓰레기를 다시 줍자”ㆍ“물건을 재활용하자” 등등.
바로 옆엔 레고로 만든 ‘슈퍼맨(?)’이 서 있었다. 7세 아이들이 직접 만든 ‘환경 히어로’다.
ISB 아이들 사이 국적 구분은 무의미했다. 인종차별이 있을 수 없다. 자기 생각을 만들고 표현하는 데 거리낌 없는 이유 중 하나다.
학년 구별. 있긴 있다. 하지만 없어질 때가 있다. 자유 주제로 별도 프로젝트를 하는 경우다. 딱 봐도 10세 미만 아이와 15세 학생들이 섞여 뭔가를 ‘같이’ 하고 있었다.
옌센:교실은 각자 따로 있지만 저학년부터 고학년까지 관심 프로젝트에 따라 모일 때도 있다. 스스로 만든다.
ISB에서 ‘자유’와 ‘공동’개념이 섞인 장면은 또 있었다. 어디선가 아이들 소리가 왁자지껄해 가 봤다. 레고가 가득찬 나무 상자 10여개로 둘러싸인 원형 공간. 아이들은 블록 놀이 삼매경이다.
Q:지금 아이들이 (레고로) 수업 중인건지?
옌센:그렇다. 이곳은 자유롭게 이용하는 공동 학습 공간이다. 보다시피 여기엔 문 닫아놓은 교실이 없지않나. 이 또한 ISB의 ‘시스템’이다.
경쟁 없는 학교의 선생님, “공부 못 하는 아이? 좀 늦게 배우는 아이가 있을 뿐”
ISB 교사를 만났다. 아이다 칸(Idah Khan) 선생은 싱가포르인이다. ‘덴마크 국제학교’ 모습을 가감없이 보고 느낀 외국인 교사다.
Q:놀면서 배운다는 게 추상적인 개념이다. 자세히 설명해 달라. Playful Learning의 핵심철학은?
칸:선생님으로서 일방적 지시보단, 학생 스스로 게임 등을 통해 자유롭게 (또는 아이들끼리) 배우는 게 학습 효과가 훨씬 높다는 의미다. 선생님은 ‘교육자’보단 ‘돕는 사람’에 가깝단 뜻이다. Q : ISB의 교과과정은 검증이 된건가?
칸:그렇다. 이 학교의 ‘과목’은 일종의 테마다. 모든 학년에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는 누구인가’ㆍ‘우리는 어디서, 언제를 살고 있나’ㆍ‘우리는 어떻게 표현하나’ㆍ‘세상은 어찌 돌아가나’ㆍ‘우리는 어떻게 Organize하나’ㆍ‘지구를 공유하기’ 등. 다만, 이론적ㆍ일방적 수업은 아니다. 주제 하나를 두고 다양한 연관 부제를 종합해 수업한다. 예를 들어 ‘돈’이라고 하면, 아이들은 계산-용도-처리-돈지갑 구성-채권채무 등 돈에 관한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배운다.
Q:한국 학생에게 가장 부족한 것 중 하나는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이다. 아이들 공감능력을 키우는 ISB만의 프로그램은 무엇인지?
칸:ISB에선 학급 마다 팀 과제 등을 통해 특정 주제를 모두 공유한다. 그러면서 서로를 이해한다. 협력한다. 이런 기술적 부분을 자연스레 익힌다. Q:수업 하다 보면, 잘하는 학생ㆍ 뒤처지는 학생이 갈릴 수 밖에 없다고 한국인들은 생각한다. 이 학교엔 ‘공부 못하는’ 학생이 없는건가?
칸:(못 하고 처지는 게 아니라) 느리게 배우는 아이가 있다. 빨리 배우는 아이도 있다. 우리는 빨리 배우는 학생과 느리게 배우는 학생이 한데 어울릴 ‘그룹’을 만든다. 다른 시도도 병행한다. 느린 부분을 스스로 혼자서 도전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다만, 클래스 별로 학습 목표를 고정하진 않았다. 한편, 빨리 습득하는 아이에겐 도전 과제를 준다. 머무르지 않게 배려한다. 스스로 노력하도록 한다. 한가지 틀 없이 각자 주어진 속도에 따라서 아이들을 배우게 하고 있다. 칸 선생의 대답이 모두 사실일까. 크로스 체크가 필요했다. 그러나 다짜고짜 ISB 아이를 붙잡고 물어볼 순 없었다.
학부모 인터뷰 “평가란 단어는 없어요…아이가 자기 스스로를 평가해요” ※ 아래 텍스트는 인터뷰 전문. 요약한 내용은 유튜브 ‘TAPAS’ 페이지 동영상으로 만나실 수 있습니다.
운 좋게도, 이 학교에 자녀를 보내는 한국인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부지선 씨다. 한국서 고등학교 교사로 지냈던 그는, 레고 직원이 된 영국인 남편과 결혼해 덴마크에 정착했다. 자신도 레고 본사의 PA(일종의 비서 직급)로 일하고 있다. 부 씨는 현재 ISB에 두 아들을 보낸다. 자녀들은 2014년 11월부터 ISB 학생이 됐다. Q:레고 직원 자녀는 ISB에 자동 배정 되나.
부지선(이하 부):아니다. 물론 ISB는 레고 (외국인) 직원이 덴마크로 왔을 때 회사가 가장 먼저 추천하는 국제학교긴 하다. 그러나 굳이 안 보내고 다른 학교 보내는 경우도 있다. Q:자녀를 ISB에 보내고 가장 인상깊었던 점이나 생각나는 에피소드는?
부:여기는 비가 많이 온다. 하루는 우산 쓰고 아이를 데리러 왔는데…둘이 운동장서 우산도 없이 진흙 투성이가 돼 놀고 있었다. ‘이렇게 컴컴하고 비오고 바람도 부는데…’ 생각하며 아이들 데리고 집에 가려는데, 옆에 다른 덴마크인 어머니(기자 주 - ISB 학생 30∼40%는 덴마크 학생이다) 가 와서 이렇게 말하더라.
“와 옷이 다 젖었네! 오늘 정말 재미있게 놀았구나!”
한국은 날씨가 나쁘면 소풍도 많이 취소 하는데, 애들 옷이 이렇게 다 젖어도 저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구나.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Q:ISB는 Playful Learning을 가장 내세우는데, 자녀들이 가장 좋아하는 수업은?
부:여기엔 과목이 따로 없다. 융합수업이다. 하나의 주제에 따라 합쳐진다. 아이한테 ‘너 학교에서 무슨 과목이 좋니?’ 물어보면 아이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다. 왜냐면 아이들에겐 수업 자체가 분리돼 있지 않고, 한 프로젝트에 섞여 있기 때문이다. 아이 스스로도 이게 어떤 과목을 배우는 건지 눈치채지 못하는 상황이 많다.
Q:예를 든다면?
부:감동 받았던 일화가 있다. 아홉 살 아이 수업 주제가 ‘사회적 평등’이었다. 내 주변 몸이 불편한 사람ㆍ배려 못 받는 이를 위해 뭘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는 내용이었다. 아이들은 이 큰 테마를 소주제로 나눠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아이가 속한 학생 팀 3명은 장애인 전용 자율주행차를 택했다. 스스로 눈 안 보이고 귀 안 들리는 한 할머니와 이메일을 주고 받더라. 그러면서 뭐가 필요한지, 불편한지 먼저 상담하고 파악한 뒤 자기들끼리 차를 ‘설계’했다. 아이는 결과물을 우리(부모)에게 보여줬다. 한 달 한 번, 1시간씩 열리는 ‘Class Room Show and Tell’ 행사에서. 아이들은 스스로 설계한 차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설명했다. 한마디로, 아이들이 오히려 스스로 커리큘럼을 만들어 간다고 보면 된다. 선생님이 뭔가를 먼저 만들지 않는다. 아이들이 원하면 선생님이 갑자기 계획해서 체험학습 나가는 수업도 많다.
선생은 교육자 대신 조력자에 가깝다는, 먼저 인터뷰 한 칸 교사 대답과 정확히 일치했다.
Q:평가 형식이 ISB와 한국 학교는 완전히 다른 듯 보인다.
부:‘평가’가 없진 않다. 다만 한국 기준으로 보면 평가가 없는 것이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평가 받는단 사실을 모른다. 평가란 개념도 없다. 연 2회 ‘스쿨 리포트’가 나오긴 한다. 그런데 선생님이 정말…점수라는 게 전혀 없다. 완전 100% 서술 평가다. 일종의 ‘잘함’ㆍ‘매우잘함’ 구별은 아예 없다. 중요한 게 있다. 학생 평가를 할 때, 선생님이 부모ㆍ아이를 모두 불러 일종의 ‘3자 상호 평가’를 한다. 아이도 같이. 처음에 아이까진 안 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같이 가 보니 ‘너는 뭐가 좋았니, 어떤 걸 잘했다, 어떤 걸 더 잘 할 수 있겠다’ 이런 걸 아이까지 같이 선생님이랑 셋이 앉아 얘기하더라.
Q:학생들도 자기 평가의 ‘주체’가 되는건가?
부:그렇다. 덴마크 회사 문화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자기를 평가하고 항상 상사도 묻는다. ‘What can you challenge to me?(당신이 스스로 노력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인가)’라고.
One of Them 취재를 마치고 ISB 관계자들과 인사했다. 오전에 기자를 안내한 옌센이 말했다. “우리 학교의 케이스를 지나치게 ‘특별하다’고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ISB는 제너럴(general)한 학교일 뿐이다” 오히려 기자는 여기서 놀랐다. 스스로 놀면서 자기들끼리 함께 배우는 ISB가, 수많은 덴마크 학교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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