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단년을 보려면 꽃을 심고, 십년을 보려면 나무를 심고, 백년을 보려면 사람을 심으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은 일시적인 것 보다는 장래를 생각해야 한다는 말과도 일맥상통 한다고 본다.
요즘 우리 주변에서는 인물이 없다고들 한다. 그것은 어느 한 공동체를 발전시킬 사람이 없다는 말인데, 왜 우리 주변이라고 인물이 없겠는가. 공연히 남이 잘 되면 시기와 질투로서 남을 음해하고 남을 해하려는 그러한 사람들이 있어 인물이 숨겨져 버리는 아닐까.
학생 한사람을 훌륭히 기르려면 학생 자신은 물론이며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그리고 집에서는 학부모가 모두 매달려야 한다. 요즘은 공부만 잘한다고 최고가 될 수는 없다. 사람은 첫째 인성이 되어야지 머리만 좋다고 공부만 잘한다고 해서 최고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닌 것 제아무리 재주가 있고 기예와 박식함이 깊더라도 사람됨이 교만하고 인색하다면 존경 받는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이러한 재주와 기예 또는 학식 등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그러나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이 교만하고 인색하다면 큰일을 이룰 수는 없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한사람 즉 자신에게 극한 된 것이지만 교만함과 인색함은 남을 대하는 태도와 관계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뛰어난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남에게 교만하고 인색하면 결국은 소인에 지나지 않다는 게 필자의 견해다.
그런 사람은 남에게 존경 받기는커녕 오히려 미움을 받게 되는 경우다. 또한, 가지고 있는 재주와 기예가 엉뚱한 방향으로 악용하여 남에게 피해를 입힐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아무리 뛰어난 재주를 가져도 교만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한 바 있다.
사람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이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돈이 많고 가진 것이 많다고 하여 좋은 차 타고 다니며 좋은 옷 입는 겉 멀쩡한 사람들이 완벽한 것이 절대 아니다. 사람은 모가 나지 않아야 한다. 모난 그릇에 모서리가 없다 함은 이론과 실제가 다름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난 그릇에 모서리가 없는데 어찌 모난 그릇이라 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은 이론과 실제가 다른데 어찌 실물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임금이 임금의 도리를 못한다든지 신하가 신하의 도리를 못한다면 어찌 임금이라 말할 수 있으며, 또한 신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요즘 세상에는 그런 예가 허다하다.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데 공연히 이름만 내려고 드는 사람, 본래의 구실은 하지도 못하면서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사람, 또한 의무는 다하지 못하면서 권리만을 주장하는 사들. 이들이 바로 모난 그릇은 그릇이되 모서리가 없는 그릇이 아니겠는가.
한편, 우리의 삶을 통해 삶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다. 삶의 주체는 사람이다. 따라서 교육은 사람과 삶을 가르치는 일이다. 사람이란 나와 타인, 즉 너이다. 너로 인해 나를 알고 나로 인하여 너를 안다. 나와 너는 독립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함께 있을 수밖에 없는 공존의 대상이기도 하다. 삶은 나와 너가 함께 이루는 현상이다.
삶의 교육에는 문제가 있고 이에 따라 너와 나는 다 같은 사람이지만 아는 방법이 다르다. 너에 대해서는 인식할 수 있지만, 나에 대해서는 자각할 수밖에 없다. 너는 앎의 대상이지만, 나는 깨달음의 대상이다. 알았을 때에는 너에 대한 앎이지 나에 대한 자각이 아니며, 깨달았을 때에는 나에 대한 깨달음이지 너를 깨달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교육이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사람임을 깨닫고 사람답게 살도록 가르치는 일이라면 사람이 무엇이고 삶이 무엇이냐, 나와 너는 누구이며 삶을 이루는 이 세계의 원리가 무엇이냐 하는 질문들은 곧 교육의 문제이다. 이들은 사실의 세계에 속하는 인지나 통찰의 대상이며, 또한 진리의 세계에 속하는 성찰과 자각의 대상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명구를 자기 교육의 표어로 삼았다. 불가에서는 자신을 알라는 차원을 넘어 깨달으라고 한다. 깨달음이 있은 후에는 깨달았다는 단계도 초월해야 한다. 깨달았다는 것을 아는 상태는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의 차이를 의식하는 단계이고, 그것은 일종의 집착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과 타인의 세계와 인생을 배우는데 절대적인 방법이란 없다. 인지나 통찰, 자각 각성 등의 어떠한 계기로서도 교육현상은 일어날 수 있다. 경계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에 얽매인 피동적인 삶이다. 인간의 자율성이 규제 받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삶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외부로부터 첨가되는 삶, 인위적이고 조작적인 삶이다.
한편 오늘의 대중사회는 전체주의로 무장되어 있다. 대중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개인은 개성을 버리고 대중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대중이 되어야 한다. 만약 청소년기를 대중에 매몰되어 보낸다면 그들은 사회가 만들어 놓은 틀에 자신을 맞추고 살아가게 된다.
다양한 개성을 지닌 인간들을 포용하는 사회가 선진사회다. 청소년들이 획일성을 강요받고 교육받고 지향하는 우리사회에 희망이 없다. 청소년들의 영혼을 좀먹게 하는 획일적인 교육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어떠한 편견을 가지지 않는 교육, 참다운 깨우침과 참다운 자기의 삶을 사는 교육이어야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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