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든 플라이어 볼(거티볼)을 담은 상자(왼쪽)와 볼 하나를 근접 촬영한 이미지.
바든 플라이어 볼(거티볼)을 담은 상자(왼쪽)와 볼 하나를 근접 촬영한 이미지.
모자에 가득 담긴 깃털(왼쪽)이 볼 한 개 생산에 필요한 양이다.
모자에 가득 담긴 깃털(왼쪽)이 볼 한 개 생산에 필요한 양이다.

지난번 '타이거 우즈 골프볼의 운명'이 흥미로웠다는 격려의 얘기를 많이 접했다. 그런데 타이거 우즈로부터 딱 100년 전인 1900년에도 골프볼의 역사가 바뀐 사건이 있었다. 두 개의 칼럼을 연결하면 골프볼 역사에 대한 간략한 줄거리를 알 수 있다는 의의가 있다. 깃털볼(페더리)의 최후깃털볼은 14세기부터 1850년대까지 약 400년 동안이나 가장 성능이 뛰어난 골프볼로 인정받았다. 깃털볼을 만드는 장인들은 하루 종일 일해야 겨우 3-4개의 볼을 만들 수 있을 뿐이었다. 큰 모자 하나를 채울 분량의 거위털이나 닭털을 끓여서, 가죽으로 만든 볼 커버에 압축해서 넣으면 하나의 볼이 완성됐다. 따라서 깃털볼의 가격은 골프 클럽보다도 훨씬 비쌌으며, 서민계층이 골프에 입문할 수 없는 큰 이유였다.앨런 로버슨은 골프의 성지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3대째 깃털볼을 제조하는 장인이었는데 품질 좋은 깃털볼을 생산할 뿐 아니라, 골프의 기량도 세인트 앤드루스의 챔피언으로 존경 받는 골퍼였다. 그의 공방에서는 훗날 디오픈에서 4회 우승하고 세인트 앤드루스의 올드코스를 오늘 날의 모습으로 개발한 톰 모리스가 도제로 근무하고 있었다.1848년 어느 날 앨런 로버슨의 공방에 낯선 방문객이 찾아왔다. 그는 주머니에서 골프볼 몇 개를 꺼내어 로버슨에게 보여 주었다. 그 볼은 말레이지아에서 생산되는 고무를 녹여서 만들어졌는데 완벽해 보이는 원형이며 깃털볼보다 훨씬 딱딱했다. 그 고무 볼은 '거티' 또는 '거타-퍼차'라고 불렸는데 로버슨은 그 볼을 보는 순간 3대를 이어온 가업이 이제 끝났다는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거티 볼은 깃털볼에 비해 비거리가 훨씬 더 길었으며 가격도 깃털볼의 5%에 불과했다. 이제 일반 골퍼들은 가격 부담이 없는 거티 볼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다급해진 앨런 로버슨은 세인트 앤드루스의 골퍼들을 모아 놓고 두 가지 볼의 성능 테스트를 시연했는데, 티샷을 한 거티 볼은 두 번 연속 심한 훅이 나면서 금작나무 숲에 쳐 박혔고 자기가 만든 깃털볼은 페어웨이 가운데로 멋지게 날아갔다. 챔피언 골퍼인 로버슨은 볼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으므로 거티 볼을 칠 때 고의로 훅을 냈다는 사실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는 거티 볼을 대량으로 사들여서 몰래 폐기해 버리는 등 시장진입을 막아보려고도 했지만, 확연한 성능차이와 가격경쟁력에 밀려서 결국 가업을 포기하고 거티 볼 판매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400년 이상 이어온 깃털볼의 생명도 끝이 났다.

스팔딩이 대대적인 투자로 만든 바든 볼의 광고지.
스팔딩이 대대적인 투자로 만든 바든 볼의 광고지.

해리 바든의 볼 ‘바든 플라이어’거티 볼이 보급되면서 골프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었고 걸출한 골프 스타들이 나타났는데, 가장 큰 인기를 누렸던 골퍼는 1896년부터 디 오픈을 6회나 제패했던 해리 바든이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해리 바든을 보지 못했다면 아직 골프를 못 본 것이다.”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고 그 소문은 미국에 까지 퍼져 나갔다. 골프 역사가들은 당시 해리 바든의 인기와 영향력을 타이거 우즈에 비교하기도 한다.한편 미국에서는 1894년 USGA가 창립되면서 본격적으로 골프 스포츠를 도입했는데, 골프 클럽과 볼 등의 고가 장비는 대부분 스코틀랜드에서 수입되었다. 부유층을 중심으로 골프 인구가 늘어가자 1900년에 미국 최대의 스포츠 용품 회사 중 하나였던 스팔딩에서 명품 거티 볼을 생산하여 시장을 석권한다는 마케팅 전략을 세웠다. 미국에서 생산되는 최초의 골프볼이었다. 스팔딩은 영국의 해리 바든과 스폰서 계약을 맺었고 골프볼의 모델명도 ‘바든 플라이어’ 라고 지어서 바든을 앞세운 대대적인 홍보를 시작했다. 당시 스팔딩과 해리 바든 사이의 계약금액은 타이거 우즈와 나이키의 계약에 버금가는 거액이었다고 한다.

와운드볼의 시대를 알린 하스켈 볼(왼쪽)과 그 광고지.
와운드볼의 시대를 알린 하스켈 볼(왼쪽)과 그 광고지.

하스켈이 발명한 와운드볼1898년 미국 오하이오 주에 거주하던 아마추어 골퍼 하스켈이 친구의 공장을 방문했다. 친구를 기다리던 중 가는 고무줄을 발견하여 장난으로 골프볼 위에 감은 뒤에 바닥에 던졌더니 거의 천정까지 튕겨 올라가는 놀라운 탄력성이 나타났다.영감을 얻은 하스켈은 작은 코어에 고무줄을 수백 겹으로 감고 커버를 씌운 골프볼을 개발하여 특허 등록을 마쳤다. 그러니까 스팔딩이 ‘바든 플라이어’ 라는 거티 볼에 대형 투자를 시작했을 때 이미 거티 볼의 성능을 훨씬 능가하는 와운드볼이 개발되어 있었던 것이다. 와운드볼은 2000년에 타이거 우즈가 훨씬 성능이 좋은 솔리드 코어 볼을 사용하여 타이거 슬램을 달성해 사라질 때까지 100년 동안 최고의 골프볼로 사랑 받았다.해리 바든의 디 오픈 3연패를 저지한 존 테일러1900년 스팔딩에서 거액을 받은 해리 바든이 미국으로 건너가 전국을 누비며 시범경기를 했다. 대도시 백화점에서는 실내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하고 스윙 시범을 보여주면서 바든 플라이어 볼을 선전했다. 그러나 깃털볼을 밀어내고 50년 동안 전성기를 누렸던 거티 볼의 최후가 다가오고 있었다.1900년 해리 바든은 미국 순회 시범경기를 중단하고 영국으로 돌아가는 배에 올랐다. 1898년 1899년 2년 연속 디 오픈을 제패한 후 3년 연속 우승에 도전하기 위해서 대회가 열리는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 코스로 가고 있었다. 세인트 앤드루스에서는 해리 바든의 평생 라이벌이었으며 디 오픈을 5회나 우승했던 존 테일러가 해리 바든의 3연패를 저지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대회 결과 테일러는 2위 해리 바든을 8타 차이로 제치고 우승하며 확실한 라이벌 구도를 보여 주었다.디 오픈 3연패에 실패한 해리 바든은 서둘러서 미국으로 돌아가 1900년 US 오픈 대회 출전을 준비했다. 미국의 신문에서는 대회를 해 보나마나 해리 바든의 우승이 확실하다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변수가 생겼다. 라이벌 존 테일러가 US 오픈에 출전 신청을 한 것이었다.

1900년 US 오픈과 존 테일러의 후회1900년 US 오픈은 시카고 골프클럽에서 개최되었다. 대회 전날 테일러가 자기의 라커를 열어보았을 때 누군가 새 골프볼을 선물로 두고 간 것을 발견했다. 테일러는 호기심으로 연습라운드에서 그 볼을 사용해 보고 깜짝 놀랐다. 드라이버의 거리가 거티 볼에 비해 20야드나 더 멀리 나갔는데, 그 볼은 하스켈 볼이었다. 테일러는 새 볼을 사용해야 할 것인지 고민에 빠졌다. 새 볼은 거리가 멀리 나가지만, 연습이 부족해서 아이언 클럽의 거리를 정확히 맞추기 어렵고 그린 주변에서의 쇼트게임 컨트롤을 위해서는 자기가 쓰던 거티 볼을 쓰는 것이 유리했다. 테일러는 결국 거티 볼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대회가 시작 되자 바든과 테일러는 역전을 주고 받으며 우승경쟁을 했는데 결과는 바든이 우승을 차지했고 테일러는 2타 차로 2위였다. 영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대서양을 건너는 배에 오른 테일러는 바다를 바라보며 후회하고 있었다. “아, 그 새 볼을 쳤어야 했는데.” 테일러의 후회는 거티 볼인 ‘바든 플라이어’의 마지막을 알리는 확실한 신호였다. 1901년 대회에서는 겨우 몇 명 만이 거티 볼을 플레이 했고 1902년부터는 어떤 선수도 거티 볼로 플레이하지 않았다. 야심 만만했던 스팔딩의 대형 투자는 큰 실패로 끝났다. ‘바든 플라이어’ 볼도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박노승: 대한골프협회 규칙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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