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주조연 배우부터 회마다 카메오 격으로 얼굴을 비추는 단역들까지 소위 말해 ‘연기 구멍’이 없다. 때문에 드라마 관계자는 이 작품을 두고 "개미들이 모여 큰 힘을 내는 드라마"(이재문 기획PD)라고까지 말한다. 하반기 브라운관에 인기 만화와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가 봇물을 이룰 때 함께 등장한 케이블 채널 tvN의 ‘미생’이다. 원작과의 그럴 듯한 ‘싱크로율’로 방송 이전부터 배우들의 면면은 이미 화제가 됐지만, 현재 ‘미생’을 촘촘히 메우고 있는 배우들의 생활연기가 놀랍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샐러리맨의 교과서’로까지 불렸던 윤태호 작가의 ‘미생’을 드라마로 만들 당시 제작진이 가장 신중을 기했던 부분은 캐스팅이다. 매회 출연하는 단역들 조차 “캐스팅에 있어 지나칠 정도로 완벽을 요구했다”는 이재문 기획PD는 “제작진은 말 그대로 사력을 다해 찾았다. 배우들이 출연했던 독립영화까지 다 찾아보며 캐스팅을 했다”고 말했다. 주연배우 캐스팅은 말할 것도 없다. 특히 제작진은 주연배우 캐스팅을 위해 “특별한 전략을 하나 세워뒀다”고 했다. “두 남자, 멘토 오 과장과 멘티 장그래의 버디물”(이재문 PD)을 구상했던 드라마였던 기획의도에 맞게 오 과장과 장그래의 캐스팅을 먼저 결정한 뒤 다른 인물들을 찾아나가는 과정이었다.
▶ “믿고 보는 배우” 이성민=이재문 기획PD는 우선 “오상식 과장 역에는 이성민 씨가 0순위였다”며 “남녀노소 누구나 믿고 볼 수 있는 배우로서 이성민이 적역이라 판단해 기획 단계였던 지난해부터 섭외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사실 배우 이성민은 원작에서 그린 오상식 과장의 샤프한 인상과 충혈된 눈을 화면으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았다. 1회 당시 이성민이 출장 후 급히 귀국하는 장면으로 첫 등장했을 당시 웹툰에서처럼 붉어진 눈을 단 한 차례 선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외형은 중요하지 않았다. 원작과의 캐릭터 싱크로율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실 싱크로율’이라는 말이 회자될 만큼 오 과장 캐릭터는 담백하고 진정성 있는 연기가 없으면 완성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이성민은 최근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 “‘미생’은 직장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 즉 우리 이야기”라며 “연기로 보여주는 것은 사람 관계일뿐 직장인을 연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2000만 직장인이 사회생활 고민 중 하나가 조직 내 인간관계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성민의 해석은 적중한 셈이다.
특히 이성민의 작은 디테일은 매회 현장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관계자들에게 따르면 이성민은 대기업 중역인 매제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연기에 반영하기에 상사맨의 작은 디테일을 잡아낸다고 한다. 바이어 미팅을 앞두고 껌을 씹는 식의 디테일이 바로 이성민이 준비한 장면이었다.
드라마의 연출을 맡은 김원석 PD는 이성민에 대해 “애드리브를 절대로 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작가가 써준 대사에 그대로 녹인다”며 “보통의 많은 배우들은 재본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바꾸고 싶어한다. 이성민 선배의 연기는 후배들이 넘어야할 산”이라며 극찬했다.
▶ “장그래의 정서를 가진” 임시완 = 2012년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을 통해 본격적으로 연기를 시작하며 주목받은 이후 KBS2 ‘적도의 남자’, 영화 ‘변호인’을 통해 임시완은 아이돌그룹 멤버 이전에 배우로 더 주목받았다. 그럼에도 연기돌 꼬리표는 약점이었다. 연기 도전 2년 만에 놀라운 성과를 내고 있었지만, “아이돌 출신이라는 선입견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놀랍게도 임시완에겐 특장점이 있었다. 이재문 PD는 “아이돌 출신은 될 수 있으면 하지 않으려 했는데 특수성이 있었다”며 “초등학교 시절부터 바둑에만 매달리며 훈련받았지만 프로 바둑기사 직전까지 갔다가 좌절하고 마는 장그래의 정서가 임시완에게 있었다”고 말했다.
임시완은 2010년 아이돌 그룹 제국의 아이들 멤버로 데뷔하기 전 힘겨웠던 연습생 시절을 거쳐 가요계에 발을 디뎠다. 어린 시절 연예인이 꿈이었다고 공공연히 밝혀왔지만, 학창시절엔 우수한 수능 성적(500점 만점에 450점)을 거두며 부산대학교에 입학한 모범생이었다. 하지만 다니던 대학을 자퇴할 만큼 열정을 가지고 가수를 꿈꿨던 임시완은 연습생 시절을 거치며 데뷔한 이후부터 10여장의 앨범을 냈으면서도 연기활동을 하기 전엔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때문에 임시완 스스로도 “장그래는 연습생 시절의 나와 닮았다”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이재문 PD는 “장그래가 원 인터에 첫 출근할 당시 몸에 맞지 않는 양복을 입고 출근했다”며 “어색한 듯 어울리지 않는 양복을 입는다는 설정이 있었지만, 임시완이 자신보다 한 치수 큰 의상을 선택하는 캐릭터를 완성했다. 임시완이 몸에도 맞지 않는 양복을 입고 카메라 앞에 선 순간 진짜 장그래가 완성됐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임시완 역시 완벽히 이입 중이다. 소극적인 장그래를 만나며 임시완은 무대 위의 화려했던 모습은 모두 지워냈다. 최근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 “장그래를 연기하고 난 뒤 부끄러움이 많아졌다”며 “이렇게까지는 아니었는데 많이 긴장되고, 당황스러우면 귀도 빨개진다. 귀까지 연기하냐는 분들도 있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면 또 귀가 빨개진다”고 말했다.
▶ “확장된 안영이, 스타성 염두” 강소라 = 매회 70분 분량의 드라마에서 안영이 캐릭터는 원작보다 비중이 높아졌다.
안영이 역의 캐스팅 당시 이재문 PD는 “원작에 비해 확장된 캐릭터였다. 보다 프로패셔널하면서도 스타성이 있는 사람을 찾다가 강소라를 캐스팅하게 됐다”고 말했다.
‘미생’의 안영이는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차가운 외모에 주어진 일 이상의 업무를 척척 해내 선배들조차 부담감을 느끼는 말 그대로 에이스 사원이다. 주위 사람들과 툭 터놓고 친밀감을 형성하진 않지만, 장그래의 비범함을 알아보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애초 강소라는 “출생의 비밀, 재벌 없이도 드라마를 할 수 있다고 해서 꼭 하고 싶었다”며 “안영이를 잘 소화하기 위해 동공연기에 신경썼다”고 제작발표회 당시 전하기도 했다.
스타성을 가진 20대 여배우 답게 예쁜 외모와 인형같은 몸매가 눈에 띄지만 강소라 역시 드라마에 무난하게 녹아들고 있다. 직장 내에선 여사원으로 남자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경쟁해야 하지만, 도리어 불합리한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이 컸다.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강소라는 안영이를 연기하며 “처음에는 내 잘못도 없는데, 나는 능력도 있는데 여성이란 이유로 핍박받아 억울했다.안영이는 (남성 중심 조직에) 지고 싶지 않은 것 같다”며 “안영이에겐 다른 선택권이 없다. 최대한 실력으로 증명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을 삼키며 부조리한 직장세계로 한 걸음 더 들어갔다.
▶ “알고 보니 잘 생긴 장백기” 강하늘= 강하늘 역시 원작과의 싱크로율은 제로에 가깝다. 동그란 안경을 쓰고 예민해보이는 인상이지만, 원작의 장백기를 맡기엔 지나치게 준수한 외모도 싱크로율을 빗나가게 한다.
이재문 PD는 그러나 “캐스팅을 고심하던 과정에서 윤태호 작가로부터 ‘장백기는 사실 굉장히 젠틀하고 전혀 외모가 떨어지지 않는 인물이다. 못 생기게 그린 캐릭터가 아니다’라는 말을 듣고, 강하늘을 낙점했다”고 말했다. 특히 강하늘의 경우 김원석 PD, 정윤정 작가와 전작 ‘몬스타’를 통해 호흡을 맞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캐릭터를 소화하는 능력은 탁월하다. 악인도 없고, 미움받는 사람도 없는 드라마에서 강하늘은 유일하게 비호감 신입으로 찍혔다. 시청자들에게다.
강하늘은 이에 대해 “큰 칭찬이라 생각한다. 비호감이라고 느끼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칭찬”이라며 “요즘 가장 힘이 나는 칭찬은 많은 분들이 장백기가 강하늘이었어라고 말씀해주실 때다. 대본이 주는 느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궁금한 캐스팅” ‘만찢남’ 변요한-김대명=이들의 정체는 “궁금증을 불러오는 캐스팅”이었다고 이재문 PD는 말한다.
‘미생’의 한석율과 김 대리 캐릭터의 경우 캐스팅 절차가 상당히 까다로웠다. 생짜 신인부터 베테랑까지 오디션이란 오디션은 다 가쳤고, 특히 한석율 캐릭터의 경우 무려 “2~3000명의 프로필 검토를 한 뒤 오디션을 봤다. 촬영 일주일 전에 낙점한 캐릭터”라고 이 PD는 설명했다.
오래 고른 캐스팅은 통했다. 한석율과 김 대리를 연기하는 변요한, 김대명은 요즘 ‘만찢남’으로 불리며 처음으로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다.
먼저 변요한은 외모 싱크로율이 높다. 만화에서처럼 2014년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5대5 가르마를 한 채 ‘현장 지상주의’를 부르짖는다. 변요한이 한석율 캐릭터를 연기하며 가장 염두했던 것은 하나다. “한석율이라는 인물을 잘 표현하는 것도 좋지만 영업3팀이든 어디든, 다른 어떤 곳에 가서도 어울릴 수 있는 회사원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대명이 연기하는 김 대리는 평범한 회사원 그 자체다. 뽀글거리는 파마머리는 다소 만화적이지만, 상사에겐 듬직한 부하직원이고, 후배에겐 믿고 따를 수 있는 선배다. 우직하게 맡은 일을 해내고, 불평이 있지만 개인보단 조직을 먼저 배려한다. 김대명은 ‘미생’의 김 대리를 연기하며 “직업의 차이만 있을 뿐 인생의 막다른 곳에서 만난 작품”이라며 “거기서 오는 공감과 감동, 깨달음이 컸다”는 말로 연기에 몰입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촬영에 한창인 현재 김대명은 완벽한 직장인이 됐다. 점심시간이 되면 식당 섭외에 앞장서고, 쉬는시간의 커피 한 잔은 서울역에 위치한 옛 대우빌딩 인근의 카페에서 직원가로 할인받아 마신다. 어딜 가나 ‘직장인’으로 본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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