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쇼팽다운 연주자’의 품위
동양인 최초 쇼팽 콩쿠르 우승자
피아니스트 당 타이 손 한국 투어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눈물은 감각을 풍성하게 하고” (당 타이 손), 고난과 역경 위에 꽃 핀 예술은 견고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거장의 손은 건반 위에서 우아하게 춤을 췄다. 그의 소리는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가장 쇼팽다운 연주자’가 보여준 격조 높고, 품위 있는 무대였다.
아시아인 최초의 ‘쇼팽 국제 음악 콩쿠르’ 우승자인 당 타이 손이 3년 만에 한국을 찾았다. 지난 16일 춘천문화예술회관을 시작으로 21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마침표를 찍는 투어였다. 마지막날인 서울 예술의전당은 오랜만에 클래식 애호가들로 북적였다. 당 타이손의 인기를 새삼 확인한 자리였다. 무수히 많은 관객이 객석을 가득 메웠고, 세대와 연령도 다양했다. 특히 전국의 ‘피아노 전공생’이 모두 몰려온듯 학생티를 벗지 않은 미래의 피아니스트들도 적잖게 눈에 띄었다.
이날 공연에서 당 타이 손은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과 드뷔시의 ‘영상’을 비롯해 쇼팽의 ‘폴로네이즈’, ‘왈츠’, ‘마주르카’, ‘에코세즈’, ‘타란텔라’ 등을 들려줬다.
앞서 진행한 서면인터뷰에서 그는 이번 연주회의 프로그램은 “내가 어떤 피아니스트인지 드러내기 가장 좋은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1부의 문을 연 라벨은 부푼 기대감과 함께 당 타이 손을 기다린 관객들을 완전히 홀려버리는 무대였다. 첫 타건부터 완전히 다른 ‘소리의 질감’이 객석을 놀라게 했다. 영롱한 첫 음이 울린 이후 선명한 타건으로 ‘고풍스러운 미뉴에트’를 이어갔다. 지독하게 맑은 타건은 7도 불협화음과 만나 미스터리한 세계를 그려갔다. 이어진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은 아름다운 선율과 소리의 결이 귀를 놀라게 했다. 일정 무게를 지닌 사람의 손이 아닌 물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소리를 내는 것처럼 정확하면서도 가벼운 타건이었다. 당 타이 손의 우아한 부드러움, 여유있는 표현력이 인상주의 곡들에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성스러운 드라마를 써내려간 1부의 여운이 가라앉기도 전에 2부에선 쇼팽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 타이 손은 스스로 쇼팽 콩쿠르 우승자이고 쇼팽 콩쿠르의 심사위원이면서, 그의 제자들이 쇼팽 콩쿠르에서 이름을 알렸다. 2021년 쇼팽 콩쿠르 우승자인 브루스 리우의 스승이기도 하다. 이날의 무대는 당 타이 손 안에 체화된 쇼팽이 고스란히 흘러나왔다.
당 타이 손은 “쇼팽은 내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작곡가”라며 “내 피에 흐를 수 있을 만큼 훈분히 쇼팽의 음악을 들었고, 쇼팽은 나의 유년시절을 채우고 음악적 성장을 도왔다”고 말했다. 그는 쇼팽이 겪은 고난, 조국에 대한 향수, 그의 외형과 성품, 감정 등 쇼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모든 것을 음악 안으로 녹였다. 그의 쇼팽은 품위있고, 단정하면서도, 흐트러짐 없다. 그것이 당 타이 손이 생각한 ‘쇼팽의 노블 매너’이기 때문이다. 당 타이 손은 최근 진행된 마스터클래서에서 “쇼팽을 연주할 때는 그의 귀족적 풍모를 잊어선 안 된다”고 했다. 특히 그는 “노블 매너가 무엇일까. 그것을 사람이나 사물, 어떤 것을 대할 때의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며 “어떤 사람이 현상에 대해 폭발적으로 반응하느냐, 아니면 조절해 반응하느냐가 쇼팽과 많은 관계가 있다”고 했다.
당 타이 손의 쇼팽은 극단적이지 않다. 그가 만들어내는 세계는 격정적이지 않은 격정이 있고, 가볍지 않은 가벼움이 있다. 경쾌함 안에 묵직함이 자리하고, 어둠 안에 찬란함이 존재한다. 참화를 딛고 선 사람, 폐허 속에서 예술적 정서를 키운 사람만이 가진 음악성인지도 모르겠다. 대조적 심상이 한 곡 안에 공존하고, 명료한 타건과 흐트러짐 없는 템포, 양손의 조화로움이 빛을 발한다.
공연의 2부는 폴로네이즈 다단조 40-2번으로 시작해 폴로네이즈 내림가장조 53번으로 마무리하는 구성도 기승전결의 서사를 보는 것처럼 빨려 들었다. 그 사이 사이에 자리한 새날처럼 예쁘고 선명한 마주르카와 왈츠에 이르기까지 쇼팽의 모범답안이었다.
이날 공연은 여러모로 인상적이었다. 연주 중 만나게 되는 거장의 몸짓도 흥미로웠다. 안경을 올리고, 오른손을 들어올려 손바닥을 뒤집고, 왼손을 뒤로 툭 보내는 행동들이 거장의 모든 호흡 안에 녹아있었다. 거장의 연주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집중도 역시 그 어떤 공연보다 뛰어났다. 그 흔한 휴대전화 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드뷔시의 ‘전주곡 1권’ L.117-11. 퓌크의 춤을 앙코르 곡으로 연주한 당 타이 손은 무려 7~8번이나 다시 무대로 나와 객석 구석구석과 마주하며 인사했고, 관객은 뜨거운 함성과 기립으로 거장을 향한 존경을 표했다. 한국 투어를 마친 당 타이 손은 마스트미디어를 통해 “한국은 우리 모두에게 열정과 패기가 가득한 나라로 익숙하다. 연주가 힘들었던 코로나19의 팬데믹 이후 3년 만에 한국을 방문해 무척이나 기쁘다”라며 “팬데믹 이후 첫 투어로 여러분과 소통할 수 있었다. 다행히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지고 영감으로 가득찬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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