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젊었을 때는 이리저리 고민했을 말도 잃을 것이 없어서인지 나이를 먹으면 간혹 소신이라고 포장하며 쏟아내게 한다. 이 글로 인해 필자의 이름이 적힌 현수막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두렵지 않다. 20년도 더 지난 일이니 당사자들이 이사 갔거나 잊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필자가 처음 개업한 변호사 사무실은 무너진 서울 서초동 삼풍백화점 바로 옆이었다. 늦은 밤, 일을 마치고 지하주차장에 내려갈 때면 공포영화처럼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2002년 겨울 흉물스럽던 삼풍백화점 자리에 고층의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서는 공사가 시작됐다. 손발이 꽁꽁 얼 정도로 추운 어느 날 아침, 창문 너머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내다보니 주상복합건물 때문에 일조권이 침해된다며 공사 반대시위를 하는 인근 아파트 주민과 전투경찰 부대가 대치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시위하던 주민 일부가 막아서는 전경들에게 소방호스로 물을 뿌려대기 시작했다. 며칠 전 내린 눈도 다 녹지 않은 영하의 날씨인데 “세상에, 부자들이 더 하네”라는 탄식이 절로 터져 나왔다.
시간이 흘러 2018년 경찰개혁위원회 인권분과 위원으로 집회 및 시위에 대한 대응 방식을 개선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고(故) 백남기 농민이 진압 경찰의 살수차에 의해 사망하는 사고가 결정적 계기가 됐다. 개혁위원회의 헌신적인 수고 덕분에 집회 및 시위에 대한 대응이 종전의 진압에서 보호로 바뀌는 개혁이 추진됐다. 이 때문인지 지금까지 서울 광화문이나 서초동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집회 및 시위 현장에서 과거와 달리 큰 물리적 충돌이 없다.
헌법상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중요한 기본권이고, 집회 및 시위는 그 내용 중 하나로서 최대한 보장돼야 한다. 그러나 개인이나 단체의 표현행위가 아무 제한 없이 절대적으로 허용되는 건 아니다.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서 반드시 타인의 권리와 조화를 이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지난 11일 서울중앙지법에서 모 대기업 회장 자택 앞에서 벌어지던 아파트재건축추진위원회의 시위에 제동을 건 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
재판부는 “휴식권, 사생활의 자유 또는 평온이 고도로 보장될 필요가 있는 개인 주거지 부근에서 마이크와 확성기 등 음향 증폭장치를 사용해 개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모욕적 발언을 하거나 구체적 정황의 뒷받침도 없이 악의적 표현을 사용해 비방하는 내용이 담긴 현수막과 유인물 등을 부착·게시하면 안 된다”고 판결했다.
집회 및 시위는 종부세를 내는 부자보다는 생존권이 문제되는 노동자나 사회적 약자의 경우 더욱 폭넓은 사회적 공감을 얻을 수 있고, 그 경우에도 타인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으로 진행돼야 한다. 최근 집회나 시위가 모욕이나 망신주기 혹은 고성방가 등의 괴롭힘 양상으로 변질되고 있어 심히 안타깝다.
아무런 잘못 없이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정치인이나 대기업 회장의 이웃이라는 이유로 밤낮없이 욕설 가득한 고성을 듣거나 집 앞에 내걸린 섬뜩한 문구가 새겨진 현수막을 읽어야 할 의무가 있는 대한민국 국민은 없다. 이번 법원의 결정처럼 법률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도 이렇게 말했다.
“네가 타인에게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너 역시 타인에게 행하지 마라.”
이찬희 법무법인 율촌 고문변호사
dingdo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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