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은 관·정치서 자유로워야
당인리발전소, 문화발전소로 구상중
창작인 지원 늘리고 문진기금 확대
5선 국회의원, 당 대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인터넷에서 그의 이름 석 자를 넣고 검색하면 프로필만 5페이지다. 정계를 떠나 유유자적 은퇴 생활을 즐겨도 모자랄 그가 다시 돌아왔다. 문화예술계에서 가장 뜨거운 곳으로. 제8기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예술위) 위원장인 정병국(65)의 행보는 많은 이들에게 ‘물음표’를 던졌다. 이미 장관까지 역임한 인물이 예술위 위원장으로 오기엔 지나치게 고퀄(고퀄리티) 스펙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런 그를 헤럴드경제가 최근 만났다. 그는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꾸기 위해 연일 강행군이었지만, 특유의 여유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지난 1월 위원장에 선임 되자마자 그가 한 일은 ‘대국민 현장 업무보고’였다. 2월 22일부터 한 달간 주제별로 14차례에 걸쳐 강행하고, 심지어 온라인으로 생중계까지 했다. 예술위 50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장관 시절부터 “답은 현장에 있다”고 강조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가 오고 나서 대학로 예술가의 집도 대대적인 리뉴얼 공사 중이다. 예술인들이 찾아와 활용하기 좋도록 2층 일부를 카페로 바꾸고, 위원장실도 같은 층에 마련했다. 문화예술진흥기금 고갈에 대한 아이디어, 2025년 개관을 목표로 하는 당인리발전소에 대한 비전 등 취임 100일을 앞두고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손수 내려준 커피가 다 식을 때까지, 한국 문화예술계 지원에 대한 그의 생각은 끝이 없었다. 아래는 일문일답.
- 국회 문광위 위원을 지내며 문화 관련 정책에 다수 참여했고, 2011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역임했다. ‘문화계 인물’이라 할 법하다. 이번에 제8기 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한 소감이 궁금하다. 현장으로 돌아오신 이유가 있는지?
▶처음엔 고사했다. 주변의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당신, 격이 안 맞다’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장관으로 일했고, 국회에서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예술위를 주도해서 만든 사람 중 하나 아니냐, 문화예술 행정을 해본 사람이 정치적으로도 관으로부터도 바람막이 역할을 하면 큰 도움 되지 않겠냐”고 하더라. 문화예술은 독립적으로 운영해야 하는 게 맞다. 정치인이라서 맞지 않는 옷이 아닌가 했는데, 이 말을 듣고 보니 회피가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사실 나는 격을 따지지 않는다(하하).
정치인 출신이라는 것이 부담일 수 있다. 예술위 위원들이 어떤 면에서 우려하는지도 잘 안다. 그런 소리 듣지 않도록 하겠다.
- 예술위의 연간 운영 예산은 얼마 정도인가, 분야별 비중은 어떻게 되나?
▶대략 3800억원 정도다. 2700억원이 지원·위탁사업이다. 이를 제하고 예술위 자체 예산은 1000억에 조금 안된다. 창작 지원은 공모로 진행한다. 지원자 중 약 20%만 통과되고 나머지 80%는 떨어진다. 개인적으로는 50% 정도는 지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창작지원 예산을 두 배 정도 키우려 한다. 그러면 지원자의 45% 정도는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면 상대적 박탈감도 줄어들지 않을까 싶다.
- 2015년 이후로 문화예술진흥기금(문진기금) 적립금이 줄어들고 있다. 5000억 원대였던 적립금이 900억 원대로 쪼그라들었다. 사실상 고갈 위기다. 해결할 방법이 있는지?
▶문진기금을 키울 수 있으면 좋겠지만 당장은 어렵다. 단기적으로는 예산을 확보하되 점차 예산 지원을 줄여 최소화하고 기금으로 운영하는 것이 목표다. 그래야 예산편성 기준과 원칙 때문에 받는 창작 지원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다.
기금 확충에 대해서는 대국민캠페인을 벌여서라도 꼭 해결하려고 한다. 2012년부터 지속해 온 ‘예술나무심기운동’을 기업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과 연계하려고 한다. 문화예술 지원도 ESG의 일환이니까. 문화예술 강국의 열매는 단순히 문화예술계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국가 이미지와 국가 브랜드 강화로 연결된다. 예전에 수출하려면 상품 설명 반, 한국이라는 나라 설명 반이었다. K-컬쳐가 전세계를 강타한 지금은 구구절절한 설명 모두 생략해도, 다 알지 않나. 기업들의 문화예술 지원척도를 알 수 있는 문화 지수를 개발해 자발적 참여를 유도할 생각이다.
- 미술시장, 공연시장 등 호황의 뜨거운 목소리가 있는 반면 여전히 예술계는 ‘춥다’는 이들이 더 많다. 문화예술 생산자들 상당수가 문화예술 유통(향유)에서 소외되어 있는 듯하다. 이 온도차는 과연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까?
▶예술위에서 지원하는 분야가 순수예술이다 보니 수지를 맞추기 어려운 구조다. 선진국의 경우는 사회적 후원을 통해 지속가능하게 운영하는데 우리는 이와 달리 국가 지원체계가 잘 갖추어져 있다. 그렇기에 문화컨텐츠 산업에서 한국이 성과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지원자의 20% 정도만 혜택을 받다 보니 그걸 절반 수준까지 끌어올리면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연극인 절반 이상이 월 평균 25만원의 수입으로 산다. 연극만 해서는 생활이 불가능하기에 투잡, 쓰리잡을 뛰며 버틴다. 그러다 보면 무대가 생겨도 서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언제든 무대에 설 수 있도록, 예술인으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재교육 센터 같은 시스템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필요하다면 교육비를 줘 가면서 라도 해야한다. 최종적으로는 예술인단체들에 대해 사회적 기부나 후원이 활성화 돼야 하지만, 그 과정까지는 국가 지원이 필요하다.
- 쉽게 말하면 예술위는 예술지원을 위한 기구다. 예술지원은 어떻게 이뤄지고, 실행되어야 하는가? 정부에 따라 지원 정책이 갈지자를 그렸다. 수월성이냐, 보편적 복지냐. 정치인 출신 위원장의 철학이 궁금하다.
▶향유권에 대해서는 어느 정권이든 쉽게 움직이지 못하는 시스템으로 정착이 됐다. 창작 지원은 수월성과 보편성이 같이가야 한다.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들, 이미 자리잡았으나 사회적으로 빛을 보지 못했던 사람들 모두 최소하는 창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하고 동시에 우수한 창작자에게는 세계로 나갈 수 있도록 뒷받침해야 한다.
- 예술위는 수 년째 ‘문화예술계와의 현장소통’을 강조해 오고 있다. 위원장으로 오시자마자 현장보고를 받는 등 ‘현장’을 강조하고 계신데, 향후 계획은?
▶기본적으로 우리 직원들이 현장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직접 지원하는 창작 연극은 보아야 하지 않을까? 보지도 않고 탁상에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건 의미가 없다. 현장과 유리된 보고서엔 ‘검토하겠다’는 말만 나온다. 검토하고서 쓰는 것이 보고서다. 실질적 지원이 가능한지 아닌지, 아니라면 왜 그런지, 그렇다면 언제 가능한 지에 대한 답이 있어야 한다.
예술위는 세금으로 운영된다. 정책 고객을 위해서 뛴다고 생각하면 된다. 모두 다 할 순 없으니 우선순위를 정하고 이를 설명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현장 보고도 그런 측면이었다. 내년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고 정책 고객들의 의견을 듣고, 잘 됐는지 아닌지 평가하고. 우리가 운영하는 예산 범위 내에서 조율하고 조정하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장에 나가는거다. 다시 말하지만 모든 답은 현장에 있다.
-가장 최근에 본 전시와 공연은 무엇인가?
▶ 가능하면 아르코 극장에서 우리가 지원한 공연은 다 보려고 한다. 어제 판소리 ‘체공녀 강주룡’을 봤다. 110분간 서서 소리하기도 힘든데 쉼없이 뛰면서 무대를 만들더라. 미술 전시는 지난 주에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에서 1세대 여성조각가로 꼽히는 김윤신의 개인전을 관람했다. 평생을 걸쳐 조각에서 승부를 본 그 에너지가 가슴을 울렸다.
-당인리발전소가 오는 2025년이면 문화발전소(문화예술복합공간)로 재탄생한다. 아르코가 운영을 담당하게 됐는데, 청사진은 나왔는지.
▶ 리모델링 예산은 확보했으나, 아직 콘셉트와 콘텐츠는 결정되지 않은 상태다.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낸 것이 2차 산업시대 에너지원, 즉 화력 발전소였다면 4차 산업시대의 에너지원은 문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온실가스 주범으로 꼽히는 화력발전소가 기후변화에 대처하고 더 많은 사람에게 문화적 공감대를 주는 에너지원으로 변한다면, 세계적 소구력이 있지 않을까. 4월 말 스웨덴에서 70여개국 문화예술 수장이 모이는 서밋이 열리는데, 그곳에서 당인리를 먼저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후 유럽에서 비슷한 콘셉트의 공간을 방문하고, 좀 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생각이다.
- 본인이 생각하는 예술의 가치란 무엇인가?
▶ 인간 사유의 결과물이다. 우리의 삶을 여유롭고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것이 예술이 아닌가. 문화예술 투자는 복지 순환의 고리다. 우리 인간사에서 문화예술이 없다고 생각하면 과연 살 맛 나는 세상일까? 문화예술은 가장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요체다.
이한빛 기자
vick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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