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따뜻한 색, 블루
프랑스 고교의 문학수업 시간. 교사가 지시하자 여학생이 소설을 읽어 내려간다. “난 여자이고, 이건 내 이야기다….”
교사가 때때로 학생들을 멈추게 한 후 묻는다. “가슴 한 구석에 뻥 뚫리는 기분이라는 것이 과연 뭘까?” “한눈에 반하는 사랑이 있을까?”
무심히 지나치듯 카메라에 잡히는 수업 교본은 작가 피에르 드 마리보의 18세기 소설 ‘마리안의 일생’이다. 한 여인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작품.
수업이 끝나면 여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잡담을 나눈다. 주위에선 잘생긴 남학생이 그중의 어느 여학생을 주시하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낸다. 누가 누굴 좋아하는지, 과연 남학생과 함께 밤을 지내본 적이 있는지, 여학생들의 은밀한 수다가 이어진다. 극중 여주인공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중 한 구절을 인용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말한다. 그 말을 받는다면, 사랑이야말로 가장 강렬한 ‘실존’의 형태이며, ‘실존’의 경험이고, ‘실존’의 확인이다. 즉, 사랑이란 호기심 어린 ‘첫경험’이기도 하며, 때로 ‘한눈에 반하는 운명’이었다가 누구에겐가는 ‘가슴에 구멍이 뚫리는 상실’로 체험된다. 사랑이란 무릇 설렘, 호기심, 혼돈, 희열, 집착, 미련, 그리움, 후회, 배신감, 질투라는 감정과 관계로 ‘실존’한다.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한 여성을 통해 생의 가장 강렬하며 비극적인 실존으로서의 사랑을 그려낸 수작이다. 두 여성간의 동성애를 극의 중심에 놓았지만, 이 작품에서의 성별은 이름 혹은 나이, 인종 따위만큼이나 ‘표지’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3류 유행가 가사로부터 고고한 철학자의 잠언까지 어쩌면 모든 인류의 궁극적인 관심사이자 탐구대상인 사랑의 다양한 속성과 관계의 방식이 이 작품 속 두 여인을 통해 그려진다.
처음은 혼돈 속 설렘과 호기심으로 사랑은 찾아왔다. 문학, 그중에서도 ‘마리안의 일생’을 유난히 좋아하는 여고생 ‘아델’(아델 엑사르코풀로스 분)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진 잘생긴 선배 남학생과 만나지만 ‘가짜 같고, 시늉만 하는 듯한’ 느낌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다. 그러던 중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파란 머리의 여대생 ‘엠마’(레아 세이두 분)에게 잊지 못할 강한 인상을 받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끌린 ‘엠마’와 ‘아델’은 만남을 이어간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는 ‘엠마’는 공공연한 동성애자로 아직 나이 어린 아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지만, 자신의 캔버스 안으로 ‘아델’을 피사체로 초대하면서 둘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는 열기에 휩싸인다. 아델의 혼돈은 확신으로 바뀌고, 그녀는 삶의 열정을 다해 엠마를 사랑하며, 엠마는 아델을 기꺼이 자신의 뮤즈로 삼는다. 아델과 엠마가 서로의 몸과 영혼을 탐닉하면서 삶과 예술, 쾌락은 행복한 합일을 이루는 듯 보였지만,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과 가정환경의 차이, 취향 및 지적 지향의 ‘다름’은 미묘한 균열을 가져온다. 질투와 집착, 갈등, 고립감, 외로움, 배신감이 둘 사이의 틈을 벌리고 차츰 파국을 향해 간다.
문학과 미술, 소설과 회화 작품을 끊임없이 인용하고 창조해가면서 극중 이야기의 겹을 풍성하게 쌓아가는 방식이 작품을 풍성하게 만든다. 매우 리얼하고 아름다우며 강도 높게 묘사된 정사신을 비롯해 일상적인 사물과 행위에 카메라를 들이대며 ‘클로즈업 화면’을 배치해내는 영상 언어도 관계의 사실성과 비극성, 삶의 현실적인 감각을 고조시킨다. 3시간의 러닝타임 내내 관객을 몰입시키는 두 주연배우의 연기가 놀랍도록 과감하며 섬세하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다. 16일 개봉. 청소년관람불가.
이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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