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최상현 기자]지난해 9월 양창수 당시 대법관은 법원을 떠나면서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와의 불편한 관계에 대해 쓴소리를 했다.
그는 “두 사법기관이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것처럼 비춰지는 것은 이롭지 않다”면서도 “두 기관의 관계를 제도적으로 시급히 개선해야 한다”고 했다.
30여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두 기관의 갈등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한 직언이었다.
민주화의 산물로 지난 1988년 출범한 헌법재판소는 27년 동안 최고 사법기관 자리를 놓고 대법원과 주도권 다툼을 벌여왔다.
조직만 보면 헌재는 대법원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헌재는 법률을 없애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다. 탄핵심판이나 정당해산 등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건으로 그 위상도 대법원을 능가할 정도로 커졌다.
2000년대 들어 재판 소원 문제를 두고 최고조에 이르렀던 헌재와 대법원의 갈등은 통진당 해산 이후 재연되는 모양새다.
법무법인 이인의 김경진 변호사는 “헌재가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지 않고 통진당 해산 결정을 내리자 대법원 판사들 사이에서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는 말들이 돌았다”며 “두 기관 기싸움에 국민들만 혼란스런 상황이 또 시작되는 것 같아 우려된다”고 말했다.
▶국민은 혼란스럽다=전주말 대법원은 이석기 상고심 판결에서 지하혁명조직(RO)의 실체에 대해 헌재와 다른 판결을 내렸다.
정당해산의 주요 근거로 사실상 RO의 실체를 인정했던 헌재의 논리를 뒤집은 것이다.
이러자 옛 통진당 관계자들은 헌재의 정당해산 결정 근거가 무너졌다고 주장했고 헌재에 재심도 청구하기로 했다.
이들은 지난 22일 대법원 판결 직후 회의를 열고 정당해산심판 재심 청구의 시기와 방안에 관해 구체적 논의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헌재가 재심을 허용하면 정당해산심판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수도 있다.
법조계 관계자는 “국민들 대다수는 헌재에서 먼저 정당해산 결정을 내려 통진당을 둘러싼 논란은 이미 끝난 것으로 알고 있는 데 이렇게 되면 국민들 입장에서는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이번에는 대법원이 헌재에 ‘선수를 친’ 판결이 나왔다.
지난 23일 대법원은 민주화운동보상법에 따라 보상을 받은 경우, 국가에 별도 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법 18조2항은 현재 헌재가 해당 법률의 위헌 여부를 심리하고 있는 조항이었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이번에는 대법원이 헌재의 결정을 기다리지 않고 성급하게 판결을 내렸다는 해석이 나왔다.
결국 대법원의 판결로 헌재가 이 조항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리더라도 소송을 제기한 당사자들은 손해 배상을 받을 수 없게 됐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 사건은 대법원에서 위헌신청이 한 차례 기각된 사안이어서 어차피 (헌재에서도) 위헌 결정이 나올 가능성은 적다고 판단한 것”이라며 “마냥 헌재의 결정을 기다릴 수 만은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헌재는 그러나 “법원에서 위헌제청이 들어와 심리 중인 사안”이라며 “위헌 여부를 예단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헌재에서 위헌 결정이 날 경우 소송 당사자들은 대법원에 재심을 청구할 수 있지만 이 경우 1년 이상의 시간과 비용이 든다. 과거 사례를 볼 때 대법원이 헌재의 결정을 받아들일 지도 미지수다.
법무법인 한결의 박상용 변호사는 “정당해산 판결은 헌재가 ‘성급한’ 측면이 있는 반면 이번에는 대법원이 헌재보다 ‘앞지른’ 것으로 볼 수 있다”며 “그러나 둘 다 재심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과거에는 기업들이 수백억원에 달하는 법인세를 돌려받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지난 2013년 당시 헌재는 GS칼텍스에 대한 옛 조세감면규제법에 따른 국세청의 법인세 부과 징수가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본 대법원의 판결에 위헌 소지가 있다는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GS칼텍스 등 2개사가 “법인세 산정과 관련한 조세감면규제법 부칙 23조가 1993년 법 개정으로 효력이 없어졌는 데도 대법원이 세금을 물리는 판결을 한 것은 기본권 침해”라고 결정했다.
GS칼텍스는 헌재의 판결을 근거로 재심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GS칼텍스는 또다시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같은 해 KSS해운과 교보생명도 비슷한 내용으로 헌재의 한정위헌 판단을 받았지만 대법원은 재심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앞서 1995년 헌재는 이길범 전 의원 등이 양도소득세 과세 취소 소송에서 패소한 뒤 낸 헌법소원에서 ‘양도소득세 부과가 부당하다’는 한정위헌 결정을 내렸다.
이씨가 다시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지만 대법원은 헌재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개헌 논의 타고 갈등 더 심해질 듯=결국 재심을 거부하는 법원과 헌재의 위헌 결정이 맞물리면서 소송 당사자들만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앞으로 개헌 논의가 본격화되면 두 기관의 힘겨루기는 지금보다 더 심해질 것이라는 데 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대법원이 최근 상고법원을 들고 나오면서 정책법원의 기능을 강조하는 배경에는 개헌을 앞두고 헌재의 기능이 강화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 숨어 있다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지난 2013년 헌재는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을 인정하고, 한정위헌 등 변형결정의 효력을 명시하는 헌재법 개정 의견을 국회에 제출했다.
국회의장 직속의 헌법개정자문위원회가 지난해 내놓은 헌법개정안에는 헌법 재판의 범위를 대폭 확대하고 대법원장의 헌법재판관 지명안을 폐지하는 등의 헌재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대한변협 노영희 수석대변인은 “결국 두 기관의 판결 사이에서 국민들만 샌드위치 신세가 돼 기본권이 외면받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며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시스템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bonsang@heraldcorp.com
![앤트로픽 IPO는 시작일 뿐…AI 모델 ‘골라주는 시장’ 커진다 [서학개미 주식회사]](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6/09/03/rcv.YNA.20260813.PRU20260813276001009_T1.jpg?type=h&h=240)
![“교과서 미래엔 AI가 있다”…‘AI 공장’된 미래엔 세종공장 [그 회사 어때?]](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6/09/02/news-p.v1.20260821.9213ff47283443e4aeec745e2b971c31_T1.jpg?type=h&h=240)
![일본서 사라진 인플레 ‘명목 앵커’…물가·엔화에 중요한 이유 [츠토무 와타나베]](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6/09/01/news-p.v1.20260816.209013b3297d4c92ab32710d529f3877_T1.jpg?type=h&h=2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