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성훈 기자] 2007년 국내 4대 정유사들(SK에너지, GS칼텍스, 현대오일뱅크, S-오일)이 담합해 유가를 인상한 사실이 적발됐다. 이들이 담합을 통해 소비자들에게 입힌 추정 피해액은 2400여억원. 곧이어 일부 소비자들이 무리를 지어 정유사들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이제 고작 1심 재판이 마무리된 이 사건은 국내에서 소비자들이 담합으로 인한 피해를 인정받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서울중앙지법 민사31부(부장 윤종구)는 화물차 운전기사 589명이 정유사들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고 15일 밝혔다. 담합으로 인한 피해가 있다는 것은 인정됐지만, 구체적으로 얼마의 피해를 입었는지를 입증하지 못한 것이 패소의 원인이었다. 기사들은 몇 년 전 어느 주유소에서 얼마어치의 기름을 구입했다는 것까지 세세히 입증해야 했지만 실패했다. 자신이 기름을 구입한 주유소가 어느 정유사로부터 기름을 받아왔는지도 입증하지 못했다. 1인당 50만원을 청구했던 이들은 패소라는 1심 판결을 얻기까지 6년간 법정에서 싸워야 했다. 변론 종결 마지막날 재판부가 이례적으로 “피고가 대기업으로서 좀더 적극적으로 소비자에게 피해보상을 해주도록 강구하는 것이 옳다”고 밝힌 소견이 그나마 위로가 될 뿐이었다.
이들 기사와는 다른 무리를 이뤄 소송을 제기했던 화물차 기사들은 지난해 일부 승소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21부(부장 최승록)는 화물차 기사 526명이 정유사들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소비자들의 입증 부담을 상당히 덜어주며 피해를 적극적으로 인정했다. 재판부는 화물차 기사들의 “기름 사용량이 전혀 불특정됐다거나 신뢰성이 없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담합 손해배상 소송 중 이례적으로 소비자의 손을 들어준 이 판결은 상급심에서 뒤집힐 가능성이 높다. 손해액을 계산하는 과정에는 ‘담합이 없었다면 형성됐을 시장가격’을 산정하는 것이 필수적인데, 이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싱가포르 현물시장(MOPS)의 가격을 기초로 담합이 없었다면 형성됐을 기름값을 산출했다. 그러나 이러한 계산 방식은 대법원이 ‘군납유류담합 소송’에서 배척한 바 있다. 군납유류담합 소송 역시 손해액을 특정하는 데 애를 먹어 13년을 끌었지만 결국 손해액을 명확히 하지 못하고 소송 당사자들의 화해로 끝을 맺었다. 민사21부는 “손해액 산정 과정에 일부 미흡하거나 의문이 제기될 수 있는 점이 있지만 이는 다른 방법에 의하더라도 마찬가지이고 어느 방법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MOPS 방식을 채택한 배경을 설명했지만 이러한 논리가 현재 진행중인 항소심에서도 받아들여질지는 미지수다.
앞으로도 오랜 법정 공방을 예고하고는 있지만 화물차 기사들은 소송이라도 걸어 볼 수 있었다. 대다수의 피해자들은 소송을 걸어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2007년 당시 녹색소비자시민연대는 유류 소비자 240명에게서 1인당 1만5000원씩을 모아 소송을 제기했지만 이내 포기해야 했다. 법원이 피해금액을 입증하라고 해서 서울대에 조사를 의뢰했는데 비용이 6억원이나 필요했기 때문이다. 승산이 불분명한, 그것도 고작 기십만원의 손해배상을 받기 위해 수억원의 조사 비용과 변호사 비용을 들여 수년간 법정 싸움을 하라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전문가들은 현행 민사법체계가 소비자들의 담합 피해 소송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주홍 녹색소비자연대 정책국장은 “현행법은 소비자에게 입증을 해야 한다는 부담, 변호사를 사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게 만들어 오히려 기업의 담합을 조장하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서상범 변호사는 “제조물책임법 상 소비자 입증책임 완화와 징벌적 손해배상 시행 등 제도 개선의 필요성이 있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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