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황혜진 기자]디자인은 더 이상 감각을 자극하는 눈요깃거리에 그치지 않는다. 디자인은 인간의 감성과 심리를 자극해 사회변화까지 가져온다.
오늘날의 디자인은 디자인이 범죄를 예방하고 사회적 약자까지 돕는다. 갈수록 거대하고 첨단화되는 도시 이면의 문제, 도시화라는 난제 앞에 디자인이 해결책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론 속 얘기가 아니다. 효과까지 입증된 실제다.
서울시는 지난해 10월 대대적인 실험에 나섰다. 재개발예정지역으로 낙후돼 대표적인 우범지역으로 꼽혔던 마포구 염리동 일대에 디자인을 ‘입힌’ 것이다.
단순히 알록달록하고 웅장한 조형물을 세워놓은 게 아니었다. 고도의 심리기법을 활용한 디자인을 도입했다. 바로 서울시의 ‘범죄예방 디자인’이다. 범죄를 예방하는 환경설계 이론인 ‘셉테드’(CPTEDㆍCrime Prevention Through Environmental Design)에 디자인을 접목시킨 것이다.
‘셉테드’가 도시가 설계되는 단계에서 진행되는 범죄 예방 디자인이라면 서울시의 ‘범죄 예방 디자인’은 이미 조성이 끝난 도시안에 접목되는 범죄예방 디자인이다. 예방과 함께 수용자들의 거부감을 없앤 디자인이라는 점은 ‘셉테드’와의 또 다른 차이점이다.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로 꼽히는 마포구 염리동은 거미줄처럼 나 있는 좁은 골목길에 조명시설까지 열악했다. 어스름 해질녘이만 인적이 끊겨 골목길을 지나는 사람들에겐 공포의 장소로 여겨졌다. 자짓 범죄의 타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의 범죄예방디자인은 미로처럼 연결된 골목길을 산책길로 변신시켰다. ‘소금길’이란 이름도 지어줬다. 과거 이 일대가 소금장수들이 많이 산 곳이라는 점을 착안했다. 1.7㎞ 산책코스로 꾸며진 소금길 위 전봇대엔 노란옷을 입혀 순서대로 숫자를 달았다. 총 69개의 전봇대다. 위험한 일이 생기면 전봇대 번호가 있는 위치로 경찰이 신속하게 출동할 수 있도록 했다.
범죄 발생 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소금지킴이집’ 6곳도 만들었다. ‘지킴이집’은 대문을 노란색을 칠했고 사인 조명과 비상벨 등을 달았다. 누군가 범죄의 위험에 처했을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골목길 파출소 역할을 하는 셈이다.
소금길 곳곳엔 신체부위별 운동을 할 수 있도록 기구와 안내판을 설치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다니도록 유도해 범죄 가능성을 줄이겠다는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 마을 곳곳에 밝은 조명과 감시카메라도 소금길을 밝혔다. 미혼 여성들이 살고 있는 다세대주택의 경우 외부 배관이나 창틀에 흔적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형광 페인트를 칠해 범죄를 예방했다. 골목길의 낡은 벽면은 밝은 느낌의 벽화를 그려 넣어 범죄심리를 위축시켰다.
범죄예방디자인이 적용된 뒤 염리동의 모습은 180도 바뀌었다. 뭔가 꺼려지던 골목길은 언제나 쉽게 다닐 수 있는 산책길이 됐다. 서울시가 지난해 10월과 올해 3월 두 차례에 걸쳐 염리동 주민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5개월간 주민 자신과 가족에 대한 범죄 두려움은 각각 9.1%, 13.6% 줄었들었다. 경찰지구대 신고 전화 감소도 30%나 급감했다. ‘시티 디자인’이 염리동이라는 작은 세상 하나를 확 바꿔 놓은 것이다.
예상치 못한 변화도 있었다. 지역사회의 유대와 응집력이 커졌다. 마을 주민들이 직접 벽화를 그리고 마을을 꾸미면서 공동체 의식이 싹튼 것이다. 실제 소금길 조성 이후 주민들의 동네에 대한 애착은 13.8%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주민들의 참여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을 그들 스스로 발견하게 만들었다.
범죄예방디자인을 도입한 강서구 공진중학교는 학교 폭력이 크게 줄었다. 주변 4400여 가구의 영구임대아파트 저소득 계층의 아이들도 전보다 밝아졌다.
시는 페인트칠이 벗겨질 정도로 방치되거나 흰색이나 회색이었던 교실과 복도를 채도가 높은 다양한 색과 그림으로 꾸몄다. 학교폭력과 흡연 등이 일어나던 어두운 구석의 탈의실이나 교내 후미진 곳엔 댄스무대, 암벽등반장, 샌드백 등을 설치했다. 폐쇄회로텔레비전(CCTV)도 달았다.
변화는 서서히 나타났다. 사각지대는 아이들이 친구들과 놀며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공간으로 바뀌어갔다. CCTV 모니터를 학교 중앙현관에 설치해 춤추고 암벽타는 아이들의 모습이 자연스레 공개될수 있도록 하자, “감시받는다”며 반발하던 아이들은 CCTV를 놀이기구로 받아들였다.
시스템과 환경의 변화는 실제 학생들의 인식도 바꿔놨다. 강서구 공진중학교는 범죄예방디자인을 도입한 이후 무질서 인식과 범죄 두려움이 각각 7.4%, 3.7% 떨어진 반면 학교 시설물에 대한 호감도는 27.8% 상승했다.
시는 디자인이 범죄와 학교폭력 예방에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오는 것으로 나타나면서 올해 말까지 중랑구 면목4ㆍ7동, 관악구 행운동, 용산구 용산2가동 등 세 곳에 범죄예방디자인을 확대 적용할 계획이다. 범죄예방 효과가 알려지면서 타 지자체는 물론 여성가족재단, 여성친화도시 서포터스, 양성평등진흥원 등에서 범죄예방디자인 벤치마킹 문의도 이어지고 있다.
hhj6386@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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