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포맷
가난과 질병으로 황폐화된 ‘지구’ 극소수만이 누리며 사는 ‘엘리시움’ 시스템 리포맷을 위해 나선 반란군
머리칸·꼬리칸으로 나뉜 ‘설국열차’와 닮은꼴 하나의 인류 두개의 세상 그 끝의 결말은…
한 시간 동안 모든 사람이 지나가는 퍼레이드가 있다. 작은 사람부터 큰 사람까지 키 순서대로 행렬은 이루어진다. 키는 소득에 비례한다. 처음에는 행인들이 보이지 않는다. 빚쟁이들, 파산한 사업가들, 즉 마이너스의 소득을 가진 사람들이 땅에 머리를 파묻고 지하로 지나가기 때문이다. 이윽고 눈을 잘 뜨고 보면 ‘개미’들이 지나간다. 키가 몇 ㎝에 불과한 시간제로 일하는 주부, 신문 배달 소년 등이다. 이어 노인, 실업자, 장사가 안 되는 자영업자, 아무도 재주를 알아주지 않는 천재 예술가 등이 차례로 등장한다.
행인들의 키가 1m 남짓 이르기까지 30분이 걸린다. 그 후로도 1m70㎝ 정도의 ‘평균키’의 소유자들을 만나기까지 꽤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행렬이 시작되고 난 48분 뒤에야 우리는 ‘보통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이때부터 행인들의 키는 쑥쑥 크기 시작한다. 곧바로 2m의 대졸회사원과 교장선생님이 나타나고, 그 뒤를 5m의 군 대령, 성공 못한 변호사들이 지나간다. 10m 전후의 대학교수와 대기업 임원, 판사 등을 거쳐 20m에 육박하는 회계사, 의사, 변호사 등이 나타난 뒤 막판 몇 십 초를 남기고 ‘거인’들이 빠른 걸음으로 등장한다. 다국적 거대기업의 임원은 100m를 넘는다. 마지막 몇 초엔 구름에 가려 얼굴을 볼 수 없는 진정한 부자들이 성큼성큼 걸어온다. 대기권을 이탈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이들이다. ‘소득에 따른 한 시간의 가상행렬’은 네덜란드의 경제학자 얀 펜이 1971년 펴낸 저서 ‘소득분배’에서 소득불평등의 정도를 묘사하기 위해 쓴 방법이다.
얀 펜의 퍼레이드를 앞뒤 바꾸어 ‘내림차순’으로 진행한다면,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 앞 칸 탑승은 행렬 시작 몇 초 만에 마감될 것이며, 소득으로 환산한 키는 도대체 얼마나 어마어마한 이들이 티켓을 얻게 될 것인가? 아니면 닐 플롬캠프 감독의 ‘엘리시움’에서 나오는 우주정거장의 시민권을 얻는 자들은 어느 정도로 대단한 이들일까?
29일 개봉한 맷 데이먼 주연의 할리우드 SF영화 ‘엘리시움’은 여러모로 ‘설국열차’를 떠올리게 되는 작품이다. 모두 황폐화된 미래의 지구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두 개의 세상으로 나뉘어져 있다. ‘설국열차’엔 머리칸과 꼬리칸이 있다면, ‘엘리시움’엔 엘리시움과 지구가 있다.
‘엘리시움’의 시간적 배경은 2154년이다. 아마도 얀 펜의 행렬에선 마지막 몇 분까지 등장하는 평균과 그 이하일 인류 대부분은 가난과 질병, 분쟁, 환경오염, 자원고갈, 인구과잉으로 ‘지옥’이나 다름없게 된 지구에서 산다. 반면 지구 밖에 인공으로 설계된 우주정거장 엘리시움엔 극소수의 선택된 시민이 평화와 풍요, 청정환경을 누리며 살고 있다. 모두가 엘리시움으로의 이주를 꿈꾸지만 개인 정보가 신체와 시스템 속에 등록된 엄격한 통제 사회는 이를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
주인공 맥스(맷 데이먼 분) 역시 엘리시움에서 살겠다는 당찬 꿈을 지닌 소년이었다. 하지만 엘리시움의 시스템을 만들어낸 거대 기업 아머다인의 공장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던 맥스는 어느날 방사능에 노출돼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다. 치료의 유일한 방법은 엘리시움에 가는 것. 여기에 맥스의 첫사랑인 프레이(엘리스 브라가 분)의 소원이 얽힌다. 그녀는 시한부생명인 어린 딸을 살려야만 한다. 그리고 불법 이주의 틈을 엿보고 있던 일군의 지구 시민들이 엘리시움의 시스템을 공격하고자 ‘반란’을 일으키고 맥스의 뒤를 따르게 된다. 맥스는 자기 한 목숨 살고자 나섰지만, 결국 어린 소녀의 생명과 지구 위 반란군의 운명을 좌우하게 된 것이다.
결국 문제는 ‘시스템’과 ‘리포맷’이다. 통치자들은 체제를 유지, 강화하기 위해 다수를 억압, 통제하고, 반란군들은 기존 시스템을 지우고 모든 것을 초기화(‘리포맷’)시키려고 무기를 든다. ‘설국열차’의 총리 메이슨(틸다 스윈튼 분)과 영구 엔진 개발자인 윌포드(애드 헤리스 분)의 짝패는 ‘엘리시움’에서 강경파 국방장관인 델라 코트(조디 포스터 분)와 통치 시스템의 고안자인 아마디온사의 사장 칼라일(윌리엄 피츠너 분)의 쌍과 대구를 이룬다. 그 반대편엔 시스템의 ‘리포맷’을 위해 나선 반란군, 크리스 에반스와 맷 데이먼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설국열차와 엘리시움의 ‘리포맷’은 과연 가능할 것인가? 가능하다면 어떤 방법이 시도됐을까? 두 영화는 닮아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한다. 과연 모든 것을 초기화하는 것 말고는 고장난 지구를 수리해서 쓸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모든 손님의 질문에 “껐다 켜!”라고 대답했다는 ‘PC방 알바 유머’가 생각나는 결말들이다.
이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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