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금융위기 이후 관치금융의 강화라는 논리에 함몰돼 정책금융을 키우는 것은 시대착오다. 정책금융기관도 역할이 끝나면 민영화하든 통폐합하는 일몰제가 필요하다. 그런 차원에서 정책금융을 재편해야 한다.
산업은행은 1970~80년대 한국의 고속 성장을 견인한 대표적 국책은행이다. 내년이면 창립 60년을 맞는 산은은 개발 연대에 건설, 중화학공업 등을 키우는 자금 파이프 역할을 했다. 자연스레 산은의 고객사는 대기업이 대부분이다. 1997년 외환위기로 대기업들이 줄줄이 쓰러지면서 산은의 역할이 바뀌었다. 침몰 위기에 처한 기업에 빌려준 돈을 자본금으로 전환해 살렸다. 금융시장과 산업 생태계를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대기업 지원 국책은행으로서 산은의 역할은 크게 축소됐다. 대기업들이 자금은 쌓아두고 투자는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산은에서 큰돈을 빌리지 않았다. 덩치가 커진 민간은행들이 산은을 대신해 기업에 대규모 투자자금을 지원했다.
이런 상황에서 산은의 민영화 방침이 나왔다. 대기업에 대한 정책금융 지원 임무가 거의 완료된 상황에서 산은을 세계적인 투자은행(IB)으로 키우고, 조금 남아있는 정책자금 공급 기능은 정책금융공사를 설립해 담당토록 한 것이다. 산은의 민영화 방침이 확정되고 정책금융공사가 설립된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진 지 1년 뒤인 2009년 말이었다.
그리고 4년여 뒤 박근혜정부가 들어서자 갑자기 산은의 민영화 방침을 철회했다. 정책금융 지원체계도 재조정하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일의 앞뒤가 바뀌었다. 개선을 하려면 먼저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하고 발생 원인을 진단해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 특히 조직을 개편하는 문제는 구성원들의 반발을 불어올 수 있으므로 더욱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추진돼야 한다. 그런데 산은 대신 정책금융을 맡았던 정책금융공사의 지난 4년간 공과에 대해 아무런 평가가 없다. 왜 산은이 정책금융을 계속 맡아야만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도 없다. 세계경제가 어려운 상황이어서 산은의 민영화 여건이 안 된다는 게 거의 유일한 설명이다. 그 와중에 산은, 정책금융공사, 수출입은행, 무역보험공사의 조직 개편 방향에 대해서만 다양한 방안들이 흘러나오고 있다. 사실 현재 모든 정책금융회사들의 임무는 중소기업 지원, 신성장 동력 사업 지원 등으로 동일하다. 중소기업 지원은 중소기업은행과 신용보증기금, 기술보증기금도 한다. 그래서 산은과 정책금융공사를 다시 통합해야 한다는 방안도 초기에 제시됐지만 이 부분은 언제부터인지 쑥 들어갔다. 오히려 대외정책금융 지원 체계에만 포커스가 맞춰지면서 본질이 무엇인지조차 흐려지는 상황이다.
산은이 민영화를 추진하게 된 근본 이유는 대기업 금융 지원 기능이 사실상 사라지고 대신 투자은행을 육성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다. 산은이 부실기업에 자금을 지원해 시장 방패막이 역할을 하는 것은 부수 효과지 본질이 아니다. 일시적 자금난에 빠진 기업을 살리고 부실기업은 퇴출하는 기업 상시 구조조정은 이제 시중은행을 포함해 모든 은행이 해야 할 역할이다. 정부가 금융위기 이후 관치금융의 강화라는 논리에 함몰돼 정책금융을 키우는 것으로 안전판을 만드는 것은 시대착오다. 이제 정책금융기관도 역할이 끝나면 민영화하든 통폐합하는 일몰제가 필요하다. 그런 차원에서 정책금융을 재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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