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일군의 사람들을 보고 즐기는 것은 매우 인간적인(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관객들은 누가 죽고 누가 살아남는지 보자는 단순한 이유에 빠져들어 특정한 극중 인물에 몰입되기 시작합니다. ‘저 사람이 바로 나같은 걸, 나라도 저런 상황이면 그렇게 행동하겠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그 인물이 죽게 되면 바로 입장을 바꿉니다. ‘저 사람같이 되지는 말아야지’라고 말입니다. 관객은 생존자를 택하는 거죠.”

지난 2006년 개봉한 영화 ‘포세이돈’의 주연 커트 러셀의 말이다. ‘포세이돈’은 항해 중 침몰한 호화유람선의 이야기를 그린 재난영화로 1972년작인 ‘포세이돈 어드벤처’를 리메이크했다. 이 영화에서 소방관 출신 뉴욕 시장 역을 맡은 커트 러셀의 말은 왜 사람들이 스크린 속 재난을 즐기는지에 대한 명쾌한 답이다. 같은 영화에 출연한 리처드 드레이푸스도 한 마디 거들었다.

“상상 속 재난은 성경이 씌어진 이래로 인간들이 끊임없이 봐 왔던 겁니다. 관객들이 지금도 재난 영화가 상영하는 객석에 앉아 있는 이유지요. 거리에서 교통사고가 나면 우리는 운전을 하다가도 속도를 늦춰 무슨 끔찍한 일이 일어났는지 굳이 보려고 합니다.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죠.”

영화 평론가 프레드 캐플런은 “현대의 일상이 주는 무료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관객들은 재난영화를 본다”고 분석했다. 그의 말대로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들은 무성영화 시절부터 따분한 일상의 관객에게 ‘재난’을 팔아 ‘롤러코스터의 짜릿함’과 ‘조난자들의 분투극’을 선사하며 주머니를 불려왔다. 가장 이른 시기의 재난영화로 꼽히는 작품 중 하나가 불타는 집과 생존자들을 구조하는 소방관의 활약을 보여준 1901년작 ‘파이어!’(Fire!)였다. 글자 그대로 ‘강건너 불구경’으로 재난영화의 오랜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무성영화로부터 시작해 1930~1940년대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재난영화는 대부분 물과 불난리, 그리고 지진이 많았다. 자연의 거대한 힘과 맞서는 인간들의 생존 투쟁을 그린 작품들이었다. 제2차 대전을 겪은 후인 1950년~60년대에는 전쟁과 핵무기에 대한 공포를 반영한 다양한 소재의 재난영화가 잇따랐다. 전쟁이나 적대적 체제와의 충돌에 대한 공포는 외계의 침입이나 행성 충돌, 괴생명체의 습격으로 스크린에 나타났다. 극지에서 발견된 괴생명체로 인한 재난을 다룬 ’더 씽’이나 외계인을 소재로 한 ‘지구가 멈추는 날’ ‘행성 X에서 온 사나이’, ‘화성침공’ ‘우주전쟁’, 행성 충돌을 그린 ‘세계가 충돌할 때’ 등이 대표적이다. ‘파이브’ ‘인베이전 USA’ 세계 종말의 날’ 등은 핵무기로 인한 대규모 살상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이와 함께 1912년 일어난 타이타닉호의 침몰에서 영감을 받은 여객선 조난 영화나 여객기 추락 영화도 1950~60년대에 다수 제작됐다.

‘재난영화’의 황금기는 1970년대였다. ‘재난영화의 경제학’ 공식이 완성된 것도 이때였다. 1970년작인 ‘에어포트’는 버트 랭카스터, 딘 마틴, 조지 케네지, 재클린 비셋 등 당대의 스타배우들을 기용하고, 폭탄 공격으로 추락 위험에 놓은 비행기 사고의 스펙터클을 보여주며 4500만달러 이상의 흥행수입을 올렸다. 이어 ‘포세이돈 어드벤처’(1972)가 다시 ‘잭팟’을 터뜨렸다. 진 해크먼, 어니스트 보그나인, 셸리 윈터 등이 출연한 이 영화는 4200만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고층 빌딩 화재를 그린 ‘타워링’, ‘어스퀘이크’, ‘에어포트 1975’ 등 재난영화의 호황이 이어졌다. 이들 작품은 ‘톱스타 출연+멀티 플롯(다양한 인물들의 사연)+재난의 스펙터클+영웅의 희생=대박’이라는 재난영화의 경제학 공식을 완성했다.

1980년대엔 뻔한 공식을 재탕하는 일련의 작품들이 흥행에 실패하며 침체기를 맞았으나, 1990년대에 들어 화려하게 부활했다. 죽어버린 재난영화의 경제학을 부활시킨 새로운 ‘변수’는 컴퓨터 그래픽이었다. 여기에 지구 온난화로 인한 이상기후, 밀레니엄을 맞아 유행한 종말론, 2000년대 이후의 경제 불황, 9ㆍ11로 대표되는 각종 테러 사건이 재난 영화의 흥행 공식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전세계 동시 개봉’이 일반화되고, 할리우드 영화가 아시아, 유럽, 남중미 등 미국 이외의 지역에서 올리는 흥행수입의 규모가 커지면서 재난영화는 할리우드의 첨단 영상기술과 자본동원력을 과시하는 최고의 장르가 됐다. 1980년대 이후 할리우드 재난영화의 흥행순위는 여전히 ‘타이타닉’의 가장 꼭대기에 있다. 무려 6억5800만달러(약 7400억원)를 벌어들였으며, ‘인디펜던스 데이’(3억600만달러), ‘트위스터’(2억4100만달러), ‘우주전쟁’(2억3400만달러), ‘아마겟돈’(2억100만달러), ‘투모로우’(1억8600만달러), ‘퍼펙트스톰’(1억 8600만달러), ‘아폴로13’(1억7300만달러), ‘2012’(1억6600만달러) 등이 뒤를 잇고 있다.

‘재난의 세계화’는 ‘재난영화의 국지화(로컬화)’도 가져왔다. 할리우드영화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지만, 영화 시장이 발전한 아시아와 유럽 지역에서도 2000년대 들어 재난 영화 제작이 활발하다. 한국영화도 2006년작인 ‘괴물’과 ‘해운대’가 관객 1000만명을 넘는 기록적인 흥행성적을 남겼고, ‘디워’ ‘타워’ ‘연가시’ 등도 대규모 관객동원에 성공했다.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