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스트 앤 본
불황은 삶을 잠식한다. 몇 년째 계속되는 경제위기가 이름 없는 삶들을 거리로 내몰고, 벼랑 끝으로 밀어낸다. 프랑스 자크 오디야르 감독의 영화 ‘러스트 앤 본’은 지난해 칸국제영화제에서 경쟁부문에 초청돼 현지에서 뜨거운 반응을 받았던 작품이다. 최근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받은 다른 작품들처럼 ‘러스트 앤 본’에도 세계를 덮친 경제위기의 그림자가 무거운 공기처럼 스크린 깊이 침잠해 있다.
젊은 아빠가 어린 아들을 위해 빵을 훔치고, 다른 이들이 버리고 간 음식들을 허겁지겁 입에 우겨 넣는다. 이런 부부도 낯설지 않다. 남편은 대량 해고의 칼날에 밥줄이 끊기고 달랑 트럭 한 대뿐인 자영업자가 됐다. 아내는 회사의 CCTV에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며 하루 종일 가격표를 찍어대는 대형마트 캐시어다. 이름 없는 자들의 삶은 어디서나 버겁고, 한 발 잘못 디디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벼랑이다.
위기에 이른 삶으로부터, 돈이 빚어낸 살풍경으로부터 ‘러스트 앤 본’은 구원과 희망의 빛을 찾아간다. 사랑이다. ‘러스트 앤 본’은 멜로드라마의 외피를 갖고 있지만, 그 안에 데일 것같이 뜨거운 드라마와 폭력, 육체, 헌신, 사랑에 대한 성찰이 객석에 압도적인 여운을 남기는 영화다.
남자주인공 알리(마티아스 쇼에나에츠 분)는 벨기에에서 삼류 복서로 마땅한 직업 없이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다가 전 부인에게 얻은 5살 아들을 갑자기 떠맡게 된다. 오갈 데 없는 알리는 대형 마트 캐시어로 일하는 누나 집에 겨우 몸을 의탁할 거처를 마련한다. 클럽 경호원으로 새 일자리를 얻은 알리는 그곳에서 곤경에 처한 한 여성을 도와준다. 당당하고 매력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범고래 조련사 스테파니(마리온 코틸라르 분)다. 알리와의 우연한 만남 후 스테파니는 범고래에게 두 다리를 잃게 되는 끔찍한 사고를 당한다. 깊은 절망에 빠진 스테파니는 지푸라기라도 잡듯 알리가 남긴 전화번호를 누른다. 불법 격투에까지 나서며 거친 본능에 의지해 닥치는 대로 살아 왔던 밑바닥 인생 알리. 관능과 미모의 상징이었던 두 다리를 잃고 절망으로부터 허우적대던 스테파니. 두 다리와 함께 ‘사랑의 희열’마저도 포기해야 했던 스테파니는 알리로부터 여전히 뜨겁게 꿈틀대는 욕망을 확인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그 어느 남녀의 관계보다 에로틱하고, 정력적이며, 아름답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전투 같은 삶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구원이 된다. ‘러스트 앤 본’은 멜로드라마일 뿐 아니라 개인의 삶을 사지로 내모는 ‘병든 사회’와 막다른 골목에서도 삶의 즐거움과 사랑의 열락에 충실한 두 남녀의 건강한 아름다움이 대비를 이루는 현대사회에 관한 ‘음화(陰畵)’이자 우화다.
주연배우 마티아스 쇼에나에츠와 마리온 코틸라르의 연기가 훌륭하고, 강렬한 이야기를 담아낸 영상도 매혹적이다. 2일 개봉. 청소년관람불가.
이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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