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길어졌다. 기온은 여전히 들쑥 날쑥이다. 하지만 바람만큼은 한결 부드럽다. 얼었던 땅들이 녹아 성글성글해지고 햇살이 따사로운 어느날 봄꽃들이 혹은 새싹들이 쏙쏙 고개를 내밀 것이다. 남도에선 이미 꽃소식도 들린다. 하늘 하늘 야리 야리 여리고도 고운 너도바람꽃, 나도바람꽃, 변산바람꽃, 풍도바람꽃 … 바람꽃집안 식구들이 벌써 꽃소식을 여기저기 알린다. 대표적인 바람꽃 집안을 학명으로 말하면 아네모네(Anemone). 바람의 여신 아네모네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네모네는 알아도 바람꽃을 몰랐다면 우리 산야의 야생화들이 조금은 섭섭할 일이다.

어쩌면 지난 겨울에도 따뜻한 틈을 타 조금씩 피었을 남도의 광대나물(진분홍빛 꽃들이 둘러나고 그 아래 둘러싼 꽃받침들의 모습이 플릴 달린 광대옷과 같다)도 보인다. 봄이 좀 더 무르익으면 꽃 중에 작은 꽃, 앉은뱅이 제비꽃, 꽃이 지나갈 무렵 올라오는 새잎이 솜 털 보송한 노루의 귀를 닮은 노루귀, 춘란이라고 부르는 은은한 향기와 도도한 모습의 보춘화, 하늘의 흰 별이 숲에 떨어진 듯 고운 별꽃과 개별꽃 …

수많은 사람들이 산에 오르지만 이토록 아름답고 고운 봄꽃들을 만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아무 곳에서나 피는 꽃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해왔던 대부분의 산행은 땀흘려 빠르게 오르기여서 이 키 작은 봄꽃들을 그냥 스쳐 지나치쳐서 눈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경이롭고 아름다운 봄 꽃들의 세상을 한 번 만나보고 싶지 않은가! 경험자로써 장담하건데 평생 충만하고 마음을 맑게 할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일이다.

그러려면 우선 마음을 열고 몸을 낮추어야 한다. 봄 꽃들은 대부분 키가 작다. 키 큰 나무들의 잎이 무성해져, 주변은 다른 식물들이 키를 올려 햇살을 가리기 전 짧은 시간동안 싹을 틔우고 꽃가루받이를 끝내고자 하는 준비성 많고 부지런한 식물들이기 때문이다.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쪼그리고 앉아 눈높이를 낮추어 들여다 보아야 둥글레의 순결한 녹백색 꽃송이를 만날 수 있으며, 은방울꽃의 흰꽃들에 마음을 열고 머무를 때 세상에서 가장 맑은 그 꽃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는 일도 봄꽃들을 만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공유하고 더불어 행복하기가 점점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내 마음 같지 않은 상대에 언제나 상처받는 것은 나 인 듯 하지만, 알고 보면 우리들은 빨리 빨리 휙휙 지나며 산에 다 올랐다고 하듯 모두 우리 자신의 눈 높이에서 사람들을 보고 행동하고 판단하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작은 봄 꽃은 몸을 낮추고 키 큰 나무는 고개를 들어야 한다. 여린 봄꽃들에게는 언 땅을 녹이고 올라온 강함을 칭찬하고 가을에 나무에 드는 단풍에게는 단풍 놀이의 즐거움 대신 모진 겨울을 눞앞에 두고 더 이상의 생장을 포기한 비장함에 위로를 주어야 한다. 이렇듯 즐거움이나 슬픔이나 혹은 모든 필요가 내 자신이 아닌 상대의 눈높이에서 마음을 열어 바라본다면 찬란한 자연을 만나듯 충만한 사람들의 세상도 만나지지 않을까 싶다.

봄꽃도 사랑하는 사람들도 제대로 만나는 모두의 새봄이길 바래본다.

이유미(산림청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