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이혜미 기자] <이 주의 화제작> 중년 남자의 욕망을 응시하는 거장의 시선, ‘화장’ (감독 임권택/출연 안성기, 김호정, 김규리/개봉 4월 9일)
‘화장’은 중의적 의미를 가진 제목이다. 죽은 이의 장례를 치르는 한 방법인 화장(火葬)과 얼굴을 꾸민다는 뜻의 화장(化粧). 소리는 같은데 뜻은 양 극단에 있다. 전자가 쇠락, 죽음을 의미한다면 후자는 생기, 삶과 맞닿아 있다. 중년의 남자 오상무(안성기 분)에게 그의 아내(김호정 분)와 부하 직원 추은주(김규리 분)는 ‘화장’의 두 가지 상이한 의미처럼 다가온다. 그는 뇌종양으로 투병 중인 아내에게서 쇠락과 죽음의 그림자를 본다. 회사에 오면 젊고 생기 넘치는 추은주의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영화는 죽어가는 아내의 곁을 지키면서 다른 여인에게 흔들리는 오상무의 복잡한 얼굴에 집요하게 집중한다.
머릿속 상상엔 금기가 없다. 누구나 한 번쯤은 얼토당토 않은 상상을 하며 얼굴을 붉힌 기억이 있을 터. 오상무도 화장품 회사의 중역, 결혼한 딸을 둔 아버지 등 위치를 떠나, 유혹과 충동에 흔들리기도 하는 나약한 인간이다. 그는 병실 간이침대에서 새우잠을 자는 와중에 추은주의 꿈을 꾸고, 아내와의 잠자리에서 벌거벗은 추은주를 떠올린다. 도덕적 잣대를 들이민다면 오상무는 파렴치한 인간일 수 있지만,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욕망을 꾹꾹 억누르는 인간은 실은 애처로운 존재다. ‘화장’의 카메라는 경멸과 동정, 그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담담한 시선으로 오상무를 비춘다.
김훈의 동명 단편 소설이 원작인 ‘화장’은 일찌감치 영화화가 추진됐다. 원작이 주인공의 심리 위주로 진행되고, 워낙 함축적인 문장들로 꾸며져 있다 보니 누가 메가폰을 잡을 지 기대 반, 우려 반의 시선이 쏠렸다. 명필름은 임권택 감독에게 시나리오를 넘기고 안도했다. 과연 임권택 감독은 삶과 죽음, 욕망과 금기, 인간의 근원적인 번뇌를 거장다운 깊이 있는 시선으로 담아낸다. 아울러 자칫 자극적으로 소비될 수 있는 중년 남자의 욕망을 담백하면서도 사려깊게 그려낸 연출이 돋보인다. 또 다른 거장인 배우 안성기는 허망한 마음으로 밤거리를 배회하는 장면에서, 아내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욕망에 대한 당혹감, 삶의 피로함 등이 뒤섞인 눈빛으로 그의 진가를 제대로 보여준다. (만족지수 ★★★★)
▶‘장수상회’(감독 강제규/출연 박근형, 윤여정, 조진웅 등/개봉 4월 9일)=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흥행 감독 강제규가 가슴 뭉클한 로맨스·가족 영화를 들고 나타났다. 그의 변신은 소박하지만 따뜻한 감성을 담은 단편 ‘민우씨 오는 날’(2014)에서 예고된 것이기도 했다. ‘장수상회’는 박근형-윤여정이 그려내는 서툴지만 귀여운 로맨스가 보는 이들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걸리게 한다. 후반부를 향해 달리면서 영화는 로맨스가 아닌 가족 영화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스펙터클(?)한 반전까지 감춰진 드라마는 흥행 공식을 의식한 선택처럼 보인다.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설렘과 시행착오 등을 겪는 노년의 로맨스에 집중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 박근형-윤여정 외에 조·단역은 이렇다 할 존재감을 주지 못한다. 특히 ‘장수’(조진웅 분)를 짝사랑하는 박양(황우슬혜 분)과 그의 동네 친구들은 영화의 웃음 코드를 위해 소비된 듯한 인상이다. 많은 캐릭터들을 활용하려다 보니 박양이 날라리 여고생들을 혼내주는 장면과 같은 불필요한 에피소드가 끼어들어 영화를 산만하게 만든다. (만족지수 ★★☆)
▶‘한 번 더 해피엔딩’(감독 마크 로렌스/출연 휴 그랜트, 마리사 토메이/개봉 4월 8일)=‘로맨틱 코미디의 황제’ 휴 그랜트가 돌아왔다. ‘한 번 더 해피엔딩’은 이제는 퇴물이 된 유명 시나리오 작가 키스 마이클스(휴 그랜트 분)가 생계를 위해 지방 대학의 교수로 일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담은 영화다. 영화는 휴 그랜트의 자전적인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면이 있다. 극 중 키스가 자신의 아카데미 각본상 수상 영상을 돌려보는 장면에선, 실제 휴 그랜트가 젊은 시절 수상 장면과 소감이 그대로 쓰여 눈길을 끈다. 키스는 다양한 학생들과 만나면서, 옛 영광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살아온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또 새로운 사랑을 만나며 ‘한 번 더 해피엔딩’을 꿈꾼다. 휴 그랜트는 여전히 매력적이지만, 그와 마크 로렌스가 호흡을 맞춰온 작품(‘투 윅스 노티스’,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 등)들에서 익숙하게 봐온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만족지수 ★★☆)
▶‘청춘의 증언’(감독 제임스 켄트/출연 알리시아 비칸데르, 킷 해링턴, 태론 에거튼 등/개봉 4월 9일)=꿈 많던 네 명의 청년들이 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겪는 비극을 그린 영화다. 작가 지망생인 베라(알리시아 비칸데르 분)는 아버지의 반대를 꺾고 옥스포드에 진학한다. 때 마침 전쟁이 벌어지면서 베라는 연인과 남동생 등 사랑하는 이들을 전쟁터로 떠나보낸다. 그들 곁에서 도움을 주고싶은 마음에 간호사로 자원한 베라는 전쟁터에서 참담한 실상을 목격하고 경악한다. 영화는 초반부엔 영국 시골 마을의 고즈넉한 풍경을 아름다운 영상으로 담아내고, 이후엔 전쟁이 남긴 상흔을 담담하게 보여주며 가슴 저릿한 울림을 준다.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의 에그시 역으로 국내 관객에게 친숙한 태론 에거튼이 영리하고 쾌활한 베라의 남동생 에드워드로 또다른 매력을 선보인다. 특히 ‘엑스 마키나’로 깊은 인상을 남긴 알리시아 비칸데르는 반전의 메시지를 전하는 베라의 연설 장면에서 주목할 만한 연기를 선보인다. (만족지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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