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의 유권자에게 표를 얻어야 하는 게 정치다. 표를 얻기 위해 거의 모든 일을 마다하지 않는 건 정치인으로서 피할 수 없는 속성이다. 예컨대, 실현 가능성보다는 우선 유권자들이 혹할 수 있는 공약을 제시하는 것도 그 중 하나다.
사실 공약은 현재 시점에서 미래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수정이나 파기의 가능성을 애당초 가질 수밖에 없다. 공적 약속의 공약이 언제든지 빌 공자 공약이 될 수 있는 것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정치의 숙명적 약점이다.
이처럼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정치의 속성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구태들도 있다.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드러내는 몇 가지 구태를 들자면 ‘처지즘’ ‘오버리즘’ ‘패거리즘’ ‘이벤티즘’ 등이다.
처지즘은 처지에 따라 언행이 달라지는 것이다. 야당일 때는 국정원의 정보정치를 비판하다가 여당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입장을 바꾼다. 얼마 전 우리 정치를 들끓게 만들었던 국회법 개정안이 좋은 예다. 야당일 때는 행정부를 견제하기 위해 모법에 어긋나는 시행령을 문제 삼다가 여당이 되면, 아니 대통령이 아니라고 하면 삼권분립 위반이라고 우긴다.
처지즘은 우리 정당 간에 얼마나 차별성이 없는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서로 비슷한 이해와 요구, 선호나 열망을 가진 집단이 정당이다. 서로 다른 정당이 존재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이해와 요구를 갖는다고 것이고, 사회의 서로 다른 부분을 대표한다는 얘기다.
집권당이 바뀌어도 정책이나 노선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정당들끼리 경쟁할 이유가 없다. 다르게 해보자는 것이 정권교체이니 처지즘은 정권교체의 의미를 희석시키는 것이다. 정치학자 쉐보르스키의 말대로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정당이 번갈아 집권하는 것이기에 처지즘은 민주주의의 정상적 작동을 가로막는 못된 관행이다.
오버리즘은 시도 때도 없이 ‘오버’(over)하는 것이다. 야당이 정부의 작은 잘못에도 습관적으로 국기문란이나 헌법 위반으로 규정하는 것이 좋은 예다. 어떤 문제만 터지면 장관 사퇴를 요구하거나 반민주라고 외치면서 장외로 나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근례의 예로는 노동개혁이나 역사교과서의 국정화를 주장하는 여당의 언사다. 법에 정해진 공공기관의 청년 의무고용도 지키지 않으면서 임금피크제를 해야 청년고용이 늘어난다고 하는 건 계산된 오버다. “쇠파이프로 (전경들을) 두드려 패는 불법파업에 공권력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우리나라가 (국민소득) 2만 달러에서 지금 10년을 고생하고 있다.” 새누리당 대표의 이 발언은 위험한 오버다.
우리 정치에서 가장 자주 듣는 명칭이 친박과 비박, 친노와 비노 등이다. 누구와 친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친○’의 명칭은 참 딱하다. 정당 내에 여러 정파나 그룹이 경쟁하는 것은 당연하다. 민주정당이라면 으레 있는 현상이다. 하지만 생각이나 정책, 비전을 기준으로 나뉘어야지 특정인과의 친소관계로 정파를 나누는 건 한심하다.
패를 나눠 서로 권력 다툼을 벌이는 패거리즘은 우리 정치의 질을 떨어뜨리는 주범이다. 일단 패거리로 나뉘면 실력으로 경쟁하지 않고 어느 편인지를 기준으로 경쟁한다. 결국 패거리는 무능을 조장한다. 본선 득표보다 예선에서의 공천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보스를 쳐다보는 데는 부지런하고, 유권자를 보살피는 데는 게을러 진다.
우리 정당엔 풀뿌리 조직이 없다. 2004년 정당개혁을 통해 지구당을 없앴기 때문이다. 돈 먹는 하마라는 명분으로 지구당을 없앴는데, 그러고 나니 정당이 일반당원이나 보통의 사람들과 소통하기 어렵게 됐다. 동네에서 정당이 사라져버렸다. 이 공백을 현역 의원들의 사조직이 대체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인의 성패는 미디어에 얼마나 자주 노출되느냐에 달려 있게 된다. 언론의 시선을 끄는 이벤트에 목을 매는 이벤티즘이 득세할 수밖에 없다. 내용보다 포장에 신경 쓰는 꼴이고,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격이다. 처지즘, 오버리즘, 패거리즘, 이벤티즘, 이 네 가지 구태만 없어져도 우리 정치는 좋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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