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고 “불리할 거 없다” 약식기소도 대법원行… 검찰도 기계적으로 기소

- 제도 악용한 얌체 소송족에다 절차 무시하고 부실한 1, 2심도 한몫

[헤럴드경제=박일한 기자] 최근 일반음식점으로 허가받고도 접대부를 고용한 채 주점을 운영하던 A씨는 1개월 영업정지와 벌금 50만원에 ‘약식기소’됐다. 그런데 주인은 정식재판을 청구했다. 결국 1심, 2심을 거쳐 대법원까지 갔다.

50만원 벌금형을 재판하기 위해 대법관 4명 등 모두 9명의 판사가 매달렸다. 하지만 대법원에서 벌금 50만원이 최종 확정됐을 뿐 달라진 것은 없었다. 오히려 재판 동안 A씨는 행정처분 효력이 발생하지 않아 영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건 약식기소 벌금형은 재판 과정에서 형이 늘지 않는 ‘불이익변경금지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재판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이 발견돼도 벌금액이 약식기소로 정해진 금액 이상을 넘지 못하도록 한 제도다.

대법원 관계자는 “일반적으로 항소심이나 상고심에서 형이 무거워질 가능성, 투자해야 하는 시간과 비용 등을 고려해 재판 진행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지만, 약식명령에 불복해 재판을 진행할 때는 그런 부담이 없으니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법원에 따르면 이렇게 약식명령에 불복해 정식 재판을 청구하는 사건이 전체 형사사건의 25% 수준이나 된다. 2014년 기준 대법원에 올라온 형사사건 2만773건 중 5283건은 이런 약식기소 벌금형이나 즉결재판에 불복해 시작된 것이다. ‘불이익변경금지 원칙’을 폐지해야 무분별한 상고를 막을 수 있다는 분석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약식기소 같은 크지 않은 사건도 피의자 입장에서 상고하는 게 유리한 것도 대법원에 일이 몰리는 이유다.

이처럼 한국인은 끝장을 본다. 또 웬만하면 2, 3심까지 간다.

김영란 전 대법관은 대법원 대법관의 일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대법관 4인으로 구성된 대법원 소부는 여름휴가를 제외하고 한 번도 쉬지 않는다. 대법관 1인당 2주에 80~100건의 사건을 가져가서 처리했다. 대법관 12명이 모두 참여하는 전원합의 판결을 위해 이침 10시부터 저녁 늦도록 토론하는 일이 반복됐다.”

1인당 재임 6년동안 처리한 사건 수는 1만건을 훌쩍 넘는다고 한다. 2015년엔 상고심 사건이 사상 처음으로 4만건을 넘긴 4만2000건 정도가 예상된다. 1인당 하루에 처리해야 하는 사건도 두자릿수에 달할 기세다.

업무 부담이 이 정도면 재판을 받는 국민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불안하다다. 판사가 면밀히 사건을 판단할 수 있을지 걱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대법원의 피로를 걱정해야 하는 이유다.

대법원에 판결이 몰리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소송건수가 많기 때문이다. 대법원 사법연감에 따르면 우리나라 민형사 소송 건수는 2014년 기준 650만건이나 된다. 민사소송이 461만건으로 압도적으로 많고, 형사사건이 164만건이나 된다. 인구 대비로 소송건수는 일본의 4배가 넘는다.

이 소송 중 98%(637만여건)는 지방법원으로 넘어간다. 소송사건 대부분이 기소 처분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중 1% 정도인 7만2000여건이 항소해 고등법원에서 재판을 다시 받는다. 최종 대법원까지는 5만1575건이 올라가며, 이중 3만7652건이 본안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처리된다.

그런가 하면 소송의 대부분이 기소 처분돼 법원으로 넘어가는 게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검찰이 너무 기계적으로 기소 처분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무죄 판단이 나오면 검찰은 거의 무조건 상고한다는 것에 불만을 느끼는 피고인들이 많다.

B변호사는 “실무적으로 무죄선고가 있으면 검찰이 억울해서 항소하거나, 새로운 증거가 나타나서 한다기보다 매뉴얼 또는 관행적으로 항소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고 전했다.

하급심에서 거쳐야할 기본적인 절차를 잘 지키지 않고 상고되는 사건도 대법원을 부담스럽게 한다. 지난 2월 대법원2부에서 ‘사기’,‘주민등록법위반’ 등으로 기소된 C씨는 하급심에서 피고인 없이 재판을 진행했다는 이유로 원심을 파기하고 다시 돌려보냈다. 피고인 없이 재판을 진행한 건 하자가 있다는 판단이다.

같은 날 대법원3부에서 ‘절도’, ‘사기’ 등의 혐의로 기소된 D씨에 대해선 이미 저지른 다른 범죄의 재판 결과를 따지는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며 원심을 파기 환송했다. 기본적으로 누범 가중이 적법한지 등을 따져야 하는데 이런 기본을 무시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