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죽음의 계곡 (26)

글 채희문/그림 유현숙

호젓한 숲속에서 스무 살 처녀의 맨 젖가슴을 두 손으로 애무하는 이 절대 절명의 순간에 다른 여자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 한승우의 고질병이었다. 이를테면 너무도 다정한 것이 그의 병이란 뜻이다.

“이 실크 옷감 좀 만져보세요. 손끝이 살살 미끄러져요.”

한승우는 불현듯 지난해에 다녀온 베트남 여행을 떠올렸다. 베트남 내해에 머물던 크루즈 여객선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던가? 잠자리 날개처럼 얇은 비치웨어 차림의 신희영은 실크 옷감의 감촉을 핑계 삼아 한승우의 손을 자신의 젖가슴 위로 잡아끌었지. 그때의 탱탱한 느낌이 하필이면 이 순간에 오버랩 될 건 뭐람.

그날, 신희영의 손길을 뿌리친 까닭은 바로 유한솜과의 추억이 떠오른 때문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오늘은 유한솜과 뜨거워지려는 찰나에 신희영과의 추억을 되살리다니… 마치 회사에선 술집 얘기하고, 술집에선 회사 걱정하는 3류 샐러리맨과 하등 다를 바 없었다.

“내 생각만 해줄 수 있냐고 물었어요.”

혀가 빠지도록 뜨거운 키스를 끝내자마자 그녀가 물었다. 어찌나 혀를 세차게 빨아대던지 한동안 턱이 얼얼해서라도 대답을 못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스무 살 시절의 입맞춤으로서는 훌륭한 상황이었다.

‘이제 나는 오빠 거예요.’

상열지사를 벌인 직후에 여자가 이렇게 말한다면 모두들 놀라서 심장이 벌떡벌떡 뛰겠지. 건드렸으니 책임지라는 협박과 다름없으므로. 그러나 지금은 조선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대처하는 여자는 드물 것이다.

“오빠, 골프 전지훈련 취소해요.”

하지만 21세기, 곧 달나라로 여름휴가를 떠나게 될 지경에도 여자의 본성은 결코 변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격렬한 입맞춤과 농밀한 젖가슴의 애무가 끝나자 유한솜은 티셔츠를 내리며 이렇게 말했다. 역시 협박과 다름없는 명령이었다.

“별일 아니야. 그냥 보편적인 회사 업무라니까?”

“여자 골프선수와 함께 간다면서요?”

“회사에서 키우기로 결정한 선수가 여자인 걸 어떡해?” “오빠는 내 운명이란 거 잘 알고 있지요? 그런 사람을 어떻게 젊은 여자와 함께 외국으로 여행을 보내요? 그것도 한 달 씩이나.”

그녀는 어느새 질투의 화신으로 돌변해 있었다. 그러나 한승우는 그녀의 말을 듣고 난 후에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가 그녀의 모친인 신희영과 줄다리기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눈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오히려 답을 쉽게 낼 수도 있었다.

“그건 공적인 업무에 불과해. 전혀 신경 쓸 필요 없어.”

한승우는 그녀의 등 뒤로 다시 손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그녀의 풀어진 브래지어 후크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아! 좋은 수가 있어요. 엄마한테 졸라서 나도 전지훈련에 따라가는 거야.”

“재수생이… 시험공부는 어떡하고? 어머님이 허락이나 하실 것 같아?”

“데리고 가지 않으면 죽어버린다고 하죠?”

한승우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작년에 베트남으로 크루즈 여행을 떠났을 때에도 신희영과 유한솜 사이에서 눈치 깨나 보았던 일을 떠올리니 식은땀이 돋을 지경이었다. 물론 그때만 해도 유한솜과는 아무런 신체적인 접촉도 없던 상태였다. 하지만 이젠 사정이 다르다. 겨우 젖가슴을 진하게 애무한 정도지만 스무 살짜리 유한솜의 마음속에 담겨있을 사랑의 감정을 결코 모를 리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허락하시지 않을 거야.”

“걱정 말아요. 나도 어엿한 성인인데 사사건건 엄마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어요. 오빠와 내가 사귀는 것도 엄마한테 허락받은 건 아니잖아요, 그쵸?”

“우리가 사귄다고?”

“그럼 아니에요? 오빠는 내 운명인데…”

난감할 따름이었다. 여자는 수렁과 같다더니 자꾸 몸이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해외 전지훈련에 따라 나서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예견하기조차 힘들었다. 그는 유민 제련그룹의 전략기획실장으로 발령 받던 날부터 이미 왕회장 신희영의 애틋한 욕망을 읽고 있었다. 신희영은 마지막 청춘에 불을 댕기는 심정이었다. 신희영이 자기를 바라보는 눈빛만 보아도 그 애절함을 느낄 수 있지 않았나.

하지만 청춘의 욕망은 이성보다 거칠었다. 마음으로는 그런 걱정을 하면서도 손은 어느새 유한솜의 젖가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브래지어 후크를 채우려 했건만 막상 손을 집어넣자 생각이 달라졌다. 그는 젖가슴을 두 손으로 움켜쥔 채로 대답했다.

“그래, 우리 한 번 사귀어 보자. 진하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