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날개에 숨긴 칼 (31)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동력선에 타고 있는 수십 명의 유람객 중에는 어김없이 현성애가 포함되어 있었다. 목포에서 하룻밤을 지새운 그녀는 어제 벌인 일엔 시치미를 똑 떼고, 원래 예약한 일정에 맞추어 사랑의 무인도 체험에 나선 것이었다. 2인 커플로 예약하고도 막상 배에는 혼자 탔지만, 이미 두 사람 몫의 여행비를 챙긴 사랑의 무인도 운영사무소 측에서는 더 이상 아무런 문제도 삼지 않았다.
예정대로라면 이 배는 사랑의 무인도에 도착하여 현성애를 내려주고, 먼저 탐사를 마친 유호성과 김지선을 태운 뒤에 다른 섬으로 돌아나가야만 했다. 그러나 태우고 나가야 할 사람들이 나타나질 않았으니 일이 예정대로 진행될 리가 없었다. 그 뿐인가? 어렴풋이나마 알몸으로 뛰어 도망가는 남녀의 모습을 본 승객들은 저마다 야단법석,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저기 저 사람들… 알몸으로 뛰어가는 거 맞죠?”
“맞아요, 분명히 알몸입니다. 우와, 앞서서 뛰는 사람은 여자예요.”
“미친 것들 아닐까요? 백주대낮에 저게 뭐하는 짓거리야?”
배가 선착장에 닿자마자 사람들은 우르르 섬으로 뛰어내렸다. 현성애는 그 순간에 맞추어 미리 준비해 온 쌍안경을 배낭에서 꺼내들었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승객들은 저마다 쌍안경을 빌려달라며 보채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앞에서 뛰는 사람은 여자고… 뒤에서 쫓아가는 사람은 남자예요. 홀랑 벗은 거 맞고요… 히야, 눈이 다 시원해지네요.”
쌍안경을 가로채다시피 해서 눈에 들이대고 보던 승객이 중계방송을 시작했다. 그들은 원래 하선할 필요도 없이 곧장 다른 섬으로 향해야 마땅했지만 천하제일의 구경거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저마다 쌍안경을 돌려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내 참! 미치겠군. 배 떠날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도 애마부인 놀이를 하고 있으면 어떡하겠다는 건지… 쯧쯧.”
애타는 사람은 유람선 선장뿐이었다. 난감하기만 했던 것이다. 오늘부로 이틀간은 현성애에게 무인도를 대여했으니 저들을 기필코 섬에서 태우고 나가야만 했다. 또한 수십 명에 달하는 승객들을 제 시간에 맞추어 다른 섬에 내려놓아야 할 판이니 무작정 저들을 기다릴 수도 없었다. 배를 되돌려 나가자니 현성애와의 계약을 위반하는 셈이었고, 무작정 기다리자니 다른 승객들과의 계약을 지킬 수 없었던 것이다.
“안되겠어요. 내가 쫓아가서 담판을 짓고 올 테니 여러분들은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선장은 이렇게 양해를 구한 뒤에 알몸의 남녀를 향해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마당에 선장의 말이라고 곱게 따를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에라, 따분하던 차에 잘 되었다. 젊은 승객들은 바짓단을 걷어붙이고는 저마다 선장의 뒤를 따라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판사판! 그 원래의 뜻을 아시는지? 원래 이판(理判)은 참선, 경전공부, 포교 등 불교의 교리를 연구하는 스님이고, 사판(事判)은 절의 산림(山林)을 맡아보는 스님을 뜻한다. 이판승이 없다면 부처님의 지혜광명이 이어질 수 없고, 사판승이 없으면 절이 존속할 수 없다. 그러니 어느 한쪽이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상호관계를 유지해야만 한다.
그러나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국교로 세운 조선조에 스님이 된다는 것은 마지막 신분계층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이판이 되었건 사판이 되었건 인생의 마지막이요, 끝장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고도 전해진다.
이틀을 굶은 터라 기운이 딸렸으므로 유호성과 김지선은 더 이상 도망칠 수도 없었다. 어차피 막다른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판사판! 김지선은 모래사장에 납작 엎드리는 것이 상책이었고, 유호성은 그나마 들고 있던 술통 뚜껑으로 사타구니만을 가린 채 선장과 대적하듯 마주설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옷을 벗고 뛰어놀면 어쩌자는 겁니까? 섬을 비워주실 시간이 지났잖아요? 저 배를 놓치면 사흘 뒤에야 다른 배가 온다는 거 잘 아시잖습니까?”
선장은 유호성에게 삿대질을 하며 호통 치기 시작했다.
<계속>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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