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날개에 숨긴 칼 (42)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목포로 향하는 비행기 실내에는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이미 창밖에 짙은 어둠이 내려 깔려있었기 때문에 승객들은 대부분 좌석 등받이를 뒤로 젖혀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민 회장은 등받이를 곧추세우고 앉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에로틱한 우정이냐, 전쟁으로 이어지는 사랑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적어도 그 순간, 유민 회장은 철학자가 되어 있었다. 목포에 도착해서 아들 유호성에게 취할 행동은 너무나 뻔했으므로 고민할 가치도 없었다. 이놈아, 앞으로 열심히 해라! 정도가 고작 아니겠는가. 문제는 현성애였다.
‘전쟁으로 이어지는 사랑을 꼭 해야만 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명저를 저술한 ‘밀란 쿤데라’는 사랑은 곧 전쟁이라고 못 박은 바 있다. 물론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었다. 의미의 깊고 얕음을 떠나 당장 현실적으로 대입해보아도 그 답은 확실했다. 유민 회장이 현성애를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당장에 아내인 신희영과의 전쟁이 시작되지 않겠는가. 신희영은 이혼하려면 현금으로 200억 원과 주식으로 6,800억 원에 달하는 회사 하나를 내놓으라고 했다. 염병! 이게 선전포고 아니면 뭐란 말인가.
‘에로틱한 우정이 훨씬 낫겠지?’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며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에로틱한 우정을 이해하기란 어려웠다. 가방 끈이 길어야만 쉽게 이해가 될 터인데 그렇지 못한 유민 회장으로서는 아리송한 문제였다. 이럴 때에도 역시 밀란 쿤데라가 답을 말해준다. 에로틱한 우정을 유지하는 동안 상대의 삶과 자유에 대해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는 관계에서만 행복해질 수 있다!
‘이를테면 섹스만 하고 다른 간섭이나 요구는 전혀 하지 않아야만 두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이로군. 거 참 기막힌 말이야.’
유민 회장은 연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이 모습을 보고 유민 회장이 끄덕끄덕 졸고 있는 것이라 착각한 스튜어디스가 가만히 다가와 그의 목 뒤에 베개를 받쳐주려고 했다. 그런데 이건 또 뭐냐? 스튜어디스의 옷자락에서 은은히 풍겨오는 향수냄새가 어쩜 강유리가 즐겨 뿌리던 것과 그리도 똑같은지…
“아가씨, 무슨 향수를 뿌리기에 이렇게 향이 좋아요?”
그는 스튜어디스에게 다짜고짜 이렇게 물었다. 하지만 조명을 끈 어두운 실내에서 은밀하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늙은이에게 교태를 섞어가며 대답해 줄 젊은 여인이 어디에 있을까? 아무리 친절을 간판으로 내세운 스튜어디스라 해도 상냥한 대답을 듣기란 애초에 기대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어서 주무세요, 손님.”
스튜어디스는 총총히 사라져갔다. 하긴 교태 섞인 상냥함을 바란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교태란 성적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을 뜻하지만 그 가능성이 확실히 드러나지는 않도록 하는 태도라고 했다. 누가? 역시 밀란 쿤데라가! 즉, 교태란 섹스를 할 수 있다는 약속이긴 하지만 보장 없는 약속이라는 뜻이다.
“염병.”
유민 회장은 이렇게 중얼거린 뒤 의자 등받이를 뒤로 깊이 내렸다. 날밤 새울 것을 대비해 잠이나 자두자는 의도였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감은 눈 속으로는 청순한 강유리의 모습과 교태 섞인 현성애의 모습이 교차하고 있었다. 감정의 무게를 천칭에 달아보면 강유리 쪽으로 기우는 것은 확실했다. 현성애 보다는 강유리에게 끌린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의 수첩갈피 속에는 오늘 밤에 사용할 비아그라가 들어 있었으니… 마음은 강유리에게 끌려도 몸은 현성애 쪽으로 향하는 것을 막을 재간이 없었다.
이왕 밀란 쿤데라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그는 에로틱한 우정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3의 규칙’을 지키라고 했다. 여자는 적어도 3주 간격으로 만날 것. 혹시 짧은 간격으로 만나게 될 경우엔 3번 이상 연속으로 만나지 말 것!
하지만 그는 현성애와 만나면서 ‘3의 규칙’을 지키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 현성애와의 관계는 어느새 에로틱한 우정의 단계를 넘어서 전쟁의 단계로 진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meelee@heraldcorp.com
![옥택연 25억에 낙찰받은 그집, 75억이 됐다…류현진 부부도 사는 강남 고급빌라 [초고가 주택 그들이 사는 세상]](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6/09/04/news-p.v1.20260904.6851255acf834221b5039de0a2498eb5_T1.jpg?type=h&h=240)
![4000만원 낼 세금을 1억 넘게 물다니…‘상속세 0원’이라도 꼭 신고해야 하는 이유 [이세상]](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6/09/03/news-p.v1.20260903.e72e37cbc9ac475abd6197c15b096a38_T1.png?type=h&h=240)
![앤트로픽 IPO는 시작일 뿐…AI 모델 ‘골라주는 시장’ 커진다 [서학개미 주식회사]](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6/09/03/rcv.YNA.20260813.PRU20260813276001009_T1.jpg?type=h&h=2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