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5~26일 국립창극단 ‘절창’

30대 젊은 소리꾼 왕윤정·김율희

MZ 여성의 시선으로 읽은 ‘흥보가’

국립창극단 ‘절창’으로 만난 왕윤정 김율희 [국립극장 제공]
국립창극단 ‘절창’으로 만난 왕윤정 김율희 [국립극장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수십 개의 가면을 쓴 것처럼 수시로 얼굴을 바꾼다. ‘고약한 놀보’이겠거니 생각하면 ‘착해 빠진 흥보’였고, ‘재간둥이 토끼’였다가 ‘답답한 거북’이었다. 단옷날의 싱그러운 춘향인 줄 알았더니 방자와 꽁냥대는 향단이었다. 신들린 ‘원맨쇼’는 기본, 작품마다 완전히 다른 옷을 입는다. 능청스럽고 뻔뻔하지만 사실은 “극I(내향형)”(김율희). 그럼에도 “닿을 듯 닿지 않는 길”(왕윤정)을 걷는 ‘30대 소리꾼’들이다.

둘이 합쳐 ‘소리 길’ 50여년. 소리면 소리, 연기면 연기,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두 젊은 소리꾼이 만났다. 국립창극단 단원 왕윤정(35)과 국악그룹 우리소리 바라지에서 활동 중인 김율희(37)다. 이들의 만남은 국립창극단이 5년째 선보이고 있는 ‘절창’ 시리즈를 통해 성사됐다.

‘절창’은 이른바 ‘MZ(밀레니얼+Z)들의 판소리’ 무대다. 국립창극단의 젊은 소리꾼들이 긴 호흡으로 만들어가는 판소리를 볼 수 있는 자리로 출발했다. 2021년 창극단 간판스타인 김준수·유태평양을 시작으로, 2022년 민은경·이소연, 2023년 안이호·이광복, 2024년 조유아·김수인으로 무대는 이어졌다. 덕분에 요즘 이 무대는 젊은 소리꾼 사이에서 꽤나 ‘핫’하다.

‘절창’의 무대는 ‘힙’하다. ‘요즘 감각’이 더해진 미니멀한 구성, 젊은 소리꾼의 시각으로 바라본 다섯 바탕의 재해석, 창극 배우들의 연기가 만나며 단숨에 젊은 관객을 끌어들였다.

김율희는 “또래 소리꾼 사이에서 나도 한번 서보고 싶다는 욕망을 갖게 하는 무대가 ‘절창’ 프로젝트”라며 “섭외 전화를 받자마자 오케이 했다”고 말했다.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한번 놀아보라며 ‘판’을 깔아주니 소리꾼으로서 무대를 향한 열망을 채울 수 있어서다. 김율희는 이날치 안이호에 이어 국립창극단 ‘절창’에 입성한 두 번째 비(非) 단원 소리꾼이다.

두 사람이 함께할 판소리는 ‘흥보가’. 2시간 30분 분량의 이야기를 적절히 매만져 소리를 보태고 쌓아가며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이들은 “김율희, 왕윤정이라는 두 소리꾼 자체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30대의 소리꾼 시선으로 유쾌하게 …최고의 판타지 ‘흥보가’

최단 9년~최장 27년. 두 사람 모두 ‘흥보가’와 만난 시간은 꽤나 길다. 모태 소리꾼으로 일명 ‘개비’(대를 이어 국악을 하는 음악인)로 불리는 왕윤정은 가장 처음 배운 ‘바탕소리’가 바로 ‘흥보가’였다. 그 때가 고작 아홉 살. 아버지 왕기철 명창에게 박록주제 ‘흥보가’를 익혔다.

“제게 ‘흥보가’는 최고의 판타지였어요. 제비가 물어다 준 박씨로 부자가 된다니, 대체 제비는 어떻게 알고 흥보네 집까지 날아왔을까 상상하며 정말 당차다고 생각했어요. (웃음)” (왕윤정)

어릴적부터 몸으로 흡수한 소리에 의문이 생긴 것은 20대에 접어들면서다. 왕윤정은 “워낙 가부장적 가치관으로 쓰인 사설이다 보니 불편한 지점이 많았다”고 했다.

악플러 수준의 ‘놀보의 독설’은 인신공격과 외모 비하에 특화됐고, ‘착함의 대명사’라지만 흥보는 가슴이 턱턱 막히는 전형적인 가부장 남편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놀보는 흥보에게 그의 아내를 두고 “네 계집, 미꾸라지가 용 됐다”고 ‘얼평’(얼굴 평가)을 날린다. 흥보가 아내에게 하는 말도 가관이다. “여자는 의복이라 옷이야 바꿔 입으면 그만이지, 형제는 내 몸과 같다”는 대사다. 김율희도 “지금의 관객들은 납득할 수 없는 말, 미간이 찌푸려지는 사설이 많다”고 공감했다. 그는 지난 2016년 한승석 중앙대 음악학과 교수에게 강도근제 ‘흥보가’를 배워 그해 완창에 도전했다.

소리꾼 김율희 왕윤정 [국립극장 제공]
소리꾼 김율희 왕윤정 [국립극장 제공]

‘몸이 부서지는 고통’으로 비유되는 완창 판소리와 여러 인물 중 한 사람이 되는 창극을 통해 ‘흥보가’를 두루 만나온 두 사람이 꺼내놓은 이번 무대의 방향성은 “30대의 두 여성 소리꾼이 바라보는 ‘흥보가’”, “지금의 관객도 유쾌하게 볼 수 있는 ‘흥보가’”다.

고전의 불편함을 잊게 해줄 ‘한 수’는 소리와 연기다. 다만 난관은 ‘흥보가’의 난이도였다. 김율희는 “‘흥보가’는 재담이 많아 재담 소리라고 불렸고, 큰 변화 없이 가져가야 하는 대목들이 많다”며 “2시간 30분 분량의 짧은 판소리라 스토리를 만들기 어렵고, 다섯 바탕 중 음악적 다이내믹이 가장 적다”고 말했다. 덕분에 ‘흥보가’는 소리꾼의 밑천을 보이는 바탕(판소리 한 편)이라고 평가된다.

저마다의 묘안은 있다. 왕윤정은 각각의 인물마다 다른 목소리를 내는 톤의 변화와 연기를, 김율희는 ‘아니리’의 재미 요소를 확대해 표현할 생각이다. 각각 배워온 박록주제와 강도근제 ‘흥보가’의 특색이다. 이 안에서 둘은 놀보와 흥보를 번갈아 오가고, 목소리를 포개 이중창(‘제비 노정기’, ‘중타령’)을 만들기도 한다. 맑고 청아한 음색의 왕윤정이 표현할 ‘긁는 목소리’의 고약한 놀부도 관전포인트다.

볼거리를 채워 넣어 ‘오늘의 관객’이 불편할 수 있는 지점은 풍자와 해학으로 접근해 웃음으로 승화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두 사람의 해법. 재해석은 멀리 있지 않았다. ‘관점의 변화’로 이야기를 다시 직조해 현재의 관객과 공감대를 마련하겠다는 생각이다.

왕윤정은 “‘흥보가’의 판타지를 음악으로 펼쳐내고, 권선징악의 구조 안에서 오늘날의 관객에게 어쩌면 무능해 보이는 흥보의 선(善)을 자연스럽게 전달하고자 한다”고 했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누군가를 도우려는 흥보의 마음, 인간이 마음 깊은 곳에 남은 본능적인 선을 드러내 보일 것”이라고 김율희도 말을 보탰다.

“‘흥보의 선’,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위로와 희망, 혹은 대리만족 등 우리가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잘 풀어내기 위해 고민 중이에요. 대단한 메시지를 가져가지 않아도 오늘의 공연을 본 뒤 ‘참 유쾌했다. 뭔가 반짝이는 것이 여기 남은 것 같다’는 마음을 주는 것이 저희의 가장 큰 목표예요.“ (김율희)

‘나만의 소리’ 찾는 여정에서 펼쳐낼 ‘지금의 소리’

두 사람의 인연이 길다. 지난 2013년 JTBC에서 국악 스타 발굴 프로젝트 ‘소리의 신’에서 둘은 경쟁자로서 처음 만났다.

10여 년이 지나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소릿길을 걸으며 같은 고민을 공유한다. 맑고 청아하게 뻗어 나오는 소리로 20~30대를 보내왔지만, 30대 중후반을 지나고 있는 지금 어떤 목소리를 찾아야 할까에 대한 고민이 크다. “자기 나이에 맞는 소리, 바탕에 맞는 음색”(왕윤정)과 “말에 담긴 이면과 맛있는 소리”(김율희)를 찾아가는 여정은 종착지가 아직도 멀다.

“늘 허공을 떠도는 기분이에요. 나의 부족함만 보이던 시절을 지나 활동이 많아진 20대엔 자신감이 붙었어요. 그러다 소리를 할수록 듣는 귀가 높아지고, 스스로의 이상이 커지니 어느 순간 자신이 다듬어지지 않은 빈껍데기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김율희)

소리꾼의 삶은 끝이 보이지 않는 길고 높다란 계단을 하염없이 오르는 과정이다. 아무리 올라도 닿을 것 같지 않은 곳을 향하기 때문이다. 오르고 또 올라도 제자리에 선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한다. “어릴 땐 1년, 3년 단위로 성장의 기쁨이 있었는데, 소리를 하면 할수록 5년, 10년, 제자리걸음을 하는 시간이 길어진다”고 김율희는 고백한다.

국립창극단 ‘절창’으로 만난 왕윤정 김율희 [국립극장 제공]
국립창극단 ‘절창’으로 만난 왕윤정 김율희 [국립극장 제공]

‘도제식 교육’도 어린 소리꾼에겐 지독한 그림자다. “따라하고 싶고, 저렇게 되고 싶어 선생님의 말붙임과 호흡 등 모든 것을 카피하려고 하지만 사실 잘되지 않아요. 잘하고 싶어 죽겠는데, 참 신기한 게 마음을 비워야 그 순간이 와요. 그래서 소리를 하며 마음공부를 하게 돼요.” (왕윤정)

‘절창’엔 두 가지 뜻이 있다. ‘아주 뛰어난 소리’와 ‘날카롭게 베인 상처’라는 의미다. 스스로를 상처내 목소리를 만들고, 그 상처를 보듬어 단단히 아문 뒤에야 소리꾼은 ‘절창’에 이른다. 두 사람은 “‘나의 목’에 맞는 ‘나의 색’과 ‘나의 소리’를 찾는 것은 평생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 ‘절창’은 ‘아주 뛰어난 소리’를 찾는 길고 고단한 여정에서 보여주는 오늘이다.

“소리는 욕심을 부린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야말로 각자의 득음을 위해 갈고 닦는 과정이죠. 고통스럽지만 존재로의 존엄을 채워주며 밀당하는 소리의 마력에 헤어날 수가 없어요. (웃음) 지금 이 소리는 30대의 두 소리꾼이 자기만의 소리를 찾아가는 길에서, 지금 이 나이 때에 할 수 있는 ‘최선의 소리’가 될 거예요.” (김율희 왕윤정)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