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없는 성당 안은 연극이 끝난 후 텅 빈 객석과는 다른 느낌이다. 공허한 적막감이 아닌 평온함이 공기 중에 섞여 있다.
작년 말 광화문에 갔다가 집회 때문에 차가 많이 막혔다. 핑계 김에, 연인과 함께 걸으면 헤어진다는 덕수궁 돌담길을 오랜만에 홀로 거닐며 첫사랑을 떠올려 보았다. 걷다 보니 날씨도 춥고 출출하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1층 카페에 들렸는데, 서가에 꽂혀있는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전국에 있는 아름답고 오래된 우리 성당을 소개하는 ‘하루쯤 성당여행’이라는 책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우리는 자주 주변의 소중한 것들을 놓치고 산다.
여행 중 유럽 성당을 보고 감탄하며 부러워했는데, 책 속 국내 성당의 아름다움이 결코 이에 뒤지지 않았다. 단숨에 읽고서 우리 성당과 성지 순례를 빠르게 결심했다. 원대한 인생 설계보다는 순간순간 마음 가는 것을 즐기며 사는 것이 행복이라 믿는 단순한 성격 탓이다.
카톨릭에는 희년(Jubilee)이라는 것이 있다. 살면서 쌓아온 죄와 빚을 하느님의 자비로 특별히 면제해주는 해이다. 1300년 보니파시오 교황이 성년(聖年)을 소집한 것에서 기원하는데, 이때 성지 순례가 많이 행해진다. 금년이 바로 50년 만에 한 번씩 돌아온다는 희년이다. 성당 순례 결심과 희년의 조합이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오묘한 섭리 같다.
순례를 시작하면서 두 가지 원칙을 정했다. 하나는 절대 하루에 2곳 이상을 방문하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당 안에서 최소한 1시간 이상 묵상이다. 커피 전문점 경품 이벤트처럼 단순히 순례 스탬프를 모으고 싶지 않았다. 살면서 고통받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상처 주었던 마음을 비우고, 그 공간에 배려와 따뜻함을 가득 채우기 위함이다.
시간은 마음먹은 만큼 주어진다. 바쁘다는 육체의 핑계는 마음의 안식을 위해 접어두었다. 세계한인무역협회의 세계대표자대회 개회식과 한국스카우트연맹의 산불피해 청소년 지원 성금 전달을 위해 경북 교육청 방문차 안동에 내려가면서,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결혼식 배경이 된 칠곡 가실성당을 찾는 짬을 내었다. 덕분에 드라마 속 금명이와 충섭이가 느꼈을 그 아름다운 봄을 만끽했다.
낮과 밤에 다른 풍경을 보여주는 성당처럼 우리 인생도 다양하다. 순례 중 마주친 여러 삶의 모습이 감동적이다. 추운 겨울 원주 용소막 성당 안에서 내일 미사 반주를 위해 얼어붙은 손으로 오르간 건반을 꼭꼭 누르며 연습하던 자매님의 따뜻함. 왜관 베네딕도 수도원 성전 안을 빗질하던 어르신의 정성. 성당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주는 친절을 베푸신 충남 진산성지성당 주임신부님의 배려. 이 모든 만남을 통해 하느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주변에 함께 하심을 깨닫는다.
이제 5월 7일부터 시작되는 콘클라베와 6월 3일 대통령 선거를 통해 대내외적으로 새로운 지도자를 만나게 된다. 리더의 중요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새로운 교황은 무조건 믿고 따를 분이 선출되리라 의심 없지만, 새로운 대통령은 스스로부터 청렴하고 항상 아래로 국민을 향하는 지도자가 선출되기를 기도한다.
이찬희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객원교수
jakmee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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