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 ‘초이1982’ 운영 최용현 씨
20세에 제과 입문…30대에 호텔 셰프
세계 최초 김치케이크·잼 만들어 ‘명성’
초콜릿 마스터→초콜릿 공장주 승승장구
잘 나갈 때 암 투병, 회사 부도로 피눈물
빵집 운영중 임대인 퇴거 요청까지 받아
서울시 ‘다시서기 프로젝트’ 덕택 재창업
부인과 동네빵집 운영…케이크 무료나눔
서울 용산구 이촌동 한 아파트 단지 앞 낡은 상가에는 ‘초이1982’라는 빵집이 있다. 테이블 3개 정도만 있는 10평 남짓한 큰 규모의 가게는 아니지만 이곳은 동네 주민들이 많이 찾는 동네 맛집이다. 특히 ‘보리밥빵’과 ‘엉겅퀴쌀깜빠뉴’는 이 빵집만이 가진 메뉴라고 한다. 여느 빵집 사장님처럼 흰 조리복을 입은 최용현(64) 씨는 비교적 한가한 오후 시간임에도 바쁘게 오븐과 조리대를 오가며 빵이 잘 구워지고 있는지 살펴보고 있었다. 최근 헤럴드경제와 만난 최씨는 평범해 보이는 동네 빵집 사장님의 모습이었지만, 사실 그에게는 남모르게 숨겨 놓은 사연이 있다.
1962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난 최씨는 원래 음악을 하던 꿈 많은 청년이었다. 하지만 사정상 음악을 하지 못하게 됐다. 결국 그는 스무살이 되던 1981년 서울로 상경한다. 마침 결혼한 누나가 서울에 살고 있어 누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먹고 살 직업을 찾아야 했다. 그때 매형의 소개로 우연히 신라호텔 베이커리부에 취직을 하게 된다. 최씨는 당시만 해도 자신이 빵을 만들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최씨는 “처음 빵 만드는 걸 배우러 들어갔는데 모든 작업이 다 단계가 있기 마련이더라. 처음에는 청소나 설거지부터 시작했다”며 “그래도 내가 손이 빨랐다. 배우는 게 빠르다 보니 몇 개월 만에 빵 만드는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나는 하나에 꽂히면 끝을 보는 성격”이라며 “젊을 때라 힘든 줄도 모르고 밤낮 없이 열심히 했다. 일이 끝나고도 혼자 남아 빵 만드는 연습을 했다”고 덧붙였다.
그렇게 빠르게 이 일에 익숙해진 최씨는 이후 서대문구 홍은동 스위스 그랜드 호텔, 강남구 역삼동 노보텔 앰배서더 호텔 강남 등 서울의 유명 5성급 호텔을 거치며 베이커리 분야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최씨는 “특히 스위스 그랜드 호텔에 갔을 때 운 좋게도 스위스에서 온 유명 셰프로부터 초콜릿 만드는 법을 배우게 됐다”며 “그때(1980년대)만 해도 아직 우리나라에서 초콜릿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좋은 스승을 만나 초콜릿 분야를 빠르게 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후 노보텔 앰배서더 호텔 강남에서는 프랑스 셰프로부터 다양한 디저트를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최씨는 “소질이 있기도 했고 일도 재미있어 정말 열심히 했다”며 “거기에 좋은 스승들까지 만나면서 실력이 쑥쑥 올라갔다”고 말했다.
노력과 기회가 쌓이면서 최씨는 빵을 만들기 시작한 지 10여년 만에 노보텔 앰배서더 호텔 강남의 베이커리 총괄 셰프까지 올라가는 고속 승진을 이뤄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0대 중반이었다.
“스위스 유명 셰프한테 초콜릿 제조법 전수”
특히 최씨는 1997년 세계 최초로 김치케이크와 김치잼을 개발했다. 실제 최씨의 김치케이크와 김치잼은 언론에도 소개됐다. 같은 해 6월 몇몇 신문과 방송에는 ‘화제의 인물’로 ‘김치로 케이크와 잼을 만든 파티시에’라는 제목의 최씨 소개 기사가 보도되기도 했다. 이후 최씨는 디저트 관련 세계 대회에도 나가 은상을 받는 등 베이커리 영역에서는 독보적인 성과를 이뤘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 이룬 성공이기에 주변의 시기와 질투도 따라왔다. 최씨는 “당시 호텔 베이커리 파트 총괄 셰프가 됐는데 밑에 있는 직원이 23명이나 됐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 높은 위치에 오르다 보니 견제가 심했다. 휘하 직원들이 단체로 ‘셰프가 너무 힘들게 일을 시킨다’고 위에 따로 보고를 하면서 갈등이 생겨 호텔을 나왔다고 한다. 그는 “호텔에서는 (나를) 붙잡았지만 마주 보면서 일할 자신이 없어 결국 내가 (호텔을) 나왔다”고 덧붙였다.
그렇게 최씨가 갑자기 무직자가 됐을 때가 1997년이었다. ‘IMF 구제금융 사태’로 기업이 파산하고 대규모 실업자가 나오던 시기였다. 이때 최씨에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 있었다. 바로 자신에게 디저트를 가르쳐 준 프랑스 셰프였다. 최씨의 소식을 알게 된 스승은 케첩으로 유명한 미국 회사 하인즈가 한국에서 초콜릿 사업을 하려고 하는데 ‘네가 해보면 좋을 거 같다’고 소개해 주었다.
IMF때 ‘스승’ 셰프 덕에 초콜릿 마스터 등극
그렇게 다시 일을 시작한 최씨는 하인즈에서 초콜릿 분야의 마스터가 된다. 최씨는 “어떻게 하다 보니 초콜릿 불모지였던 국내에서는 초콜릿을 거의 처음 한 사람이 됐다”며 “전국을 돌며 초콜릿을 만드는 교육을 하기도 했고 기능올림픽 국가대표 감독까지 돼 학생들과 함께 세계 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이렇게 초콜릿으로 성공한 최씨는 2001년 충북 옥천에 큰 초콜릿 공장을 차리며 자신의 사업을 시작한다. 초콜릿만큼은 누구보다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예상대로 회사는 점점 규모를 키우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이렇게 멈출 줄 모르고 성공 가도를 달리던 최씨의 인생에 큰 변곡점이 생긴다. 그는 어느 날부터 오른 다리가 저리며 조금씩 다리를 절게 됐다고 한다.
축구를 좋아해서 운동을 자주 하던 최씨는 처음에는 인대가 좀 늘어나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장인이 자신의 걷는 모습을 보더니 병원에 한 번 가보라고 했다. 그렇게 찾은 병원에서 최씨는 ‘골육종’ 진단을 받았다. 골육종은 뼈에 생기는 악성 종양이다. 최씨는 의사로부터 오른쪽 허벅지 뼈에 종양이 생겼으니 뼈를 잘라내야 한다는 믿기 힘든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한 번 ‘제동’이 걸리자 나쁜 일이 연이어 찾아왔다. “회사에 나랑 이름이 같은 친구가 있었다. 내가 그 친구를 신뢰해 초콜릿도 가르쳐 주고 그랬다. 수술을 앞두고 그 친구에게 내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회사를 잘 지켜달라고 했다.”
그런데 뼈를 잘라내는 수술을 마친 뒤 한 달 만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 들었다. 회사가 부도가 났다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믿었던 그 동명이인 직원이 나쁜 마음을 먹고 회삿돈을 빼돌려 일부러 회사를 망가뜨린 것이었다.
최씨는 그때를 생각하며 “정말 그때 처음으로 피눈물이라는 걸 흘렸다”며 “목발을 짚고 공장을 갔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공장을 보고 주저앉아 울다 기절을 하기도 했다”고 말을 이었다. “아마 그때 그걸 되찾으려고 했다면 난 속이 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분하고 억울했지만 최씨는 이 일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제과기능장인 부인과 함께 서울 용산구 이촌동에 작은 빵집을 열었다. 이때가 2014년이다. 이후 최씨는 지금까지 10여년 동안 이 빵집을 운영하고 있다.
건강·사업서 잇따르는 시련…그리고 재기
지난해 최씨에게 또 한 번의 시련이 찾아왔다. 그렇게 10년 넘게 운영하던 가게에서 갑자기 쫓겨나게 된 것이다. 최씨는 “임대인이 찾아와 사정을 설명하고 그런 것도 없이 내용증명서 종이 한 장만 달랑 보냈다”며 “억울하고 화가 났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고 방법을 고민했다”고 말했다.
이때 또 한 번 최씨의 손을 잡아준 것은 서울시였다. 최씨는 우연히 서울시와 서울신용보증재단이 운영하는 ‘서울형 다시서기 프로젝트’를 알게 됐다. 서울형 다시서기 프로젝트는 사업 실패 경험이 있거나 재도전 의지가 있는 소상공인에게 재창업의 기회를 주는 지원 프로그램이다. 서울시는 1대1 컨설팅, 최대 200만원의 초기 자금, 저금리 신용보증 대출 등을 지원하고 있다.
최씨는 “재창업을 위한 4000만원을 빌리면서 서울신보가 이자 2.5%를 내주고 첫 월세 200만원도 지원해 줬다”며 “서울시 덕분에 재창업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최씨는 서울시의 도움을 받아 기존 가게에서 30m 정도 떨어진 지금의 상가 건물에 ‘초이1982’ 간판을 달고 지난해 12월 가게 문을 다시 열 수 있었다.
그동안 자신의 성공만을 위해 달렸던 최씨는 이런 힘든 일을 겪으며 어려움에 처한 다른 사람을 보게 됐다고 한다. 그렇게 5년 전 시작한 것이 케이크 무료 나눔 봉사다. 최씨는 매달 주민센터와 함께 케이크를 만들어 홀로 사는 어르신이나 기초생활수급자에게 무료로 케이크를 나눠주고 있다. 다만 본인이 하는 일은 알리고 싶지 않아 주변 가족 정도만 알게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고 했다.
최씨는 “앞만 보고 달렸던 그때는 명예나 돈이 행복인 줄 알았다”면서 “그런 힘든 일을 겪고 나니 가족과 함께 이렇게 소소하게 남을 도우며 지내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고 마음이 편하다”고 웃으며 말했다.
손인규 기자
ikso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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