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재무부·연준 두 사령탑의 막후 실세 드러켄밀러
베선트와는 ‘헤지펀드 대부’ 소로스 펀드서 ‘한솥밥’
워시는 연준의장 직전까지 듀케인패밀리서 10년 근무
아이비리그·상경계 출신 아닌 금융맨…박사과정도 중퇴
듀케인캐피털서 30년간 연평균 30% 수익률 ‘월가 전설’
8000억원 기부에 2009년 1위 기부 자산가 등극
73세 고령에도 여전한 현역 투자자
채권시장이 말하게 두라.
[헤럴드경제=김영철 기자] 미국의 장기 국채 수익률이 30년만에 최고치를 찍으면서 금융 당국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장기물 금리 상승은 주택담보대출 금리를 올리고 기업의 차입비용을 올려 경제에 부담을 주고 경기회복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이 장기 국채 바이백(Buyback·재매입) 확대라는 초강수를 둔 배경이다.
하지만 베선트의 결단을 직격한 인물이 있다. 억만장자 투자자이자 ‘월가의 전설’로 불리는 스탠리 드러켄밀러(73) 듀케인패밀리오피스 회장이다. 그는 월스트리트저널(WSJ) 기고문에서 미 재무부의 국채 바이백 확대를 두고 “40억달러라는 액수를 뛰어넘는 큰 실수”라고 대놓고 비판했다.
베선트 장관은 즉각 반격했다. 그는 “스탠은 훌륭한 투자자지만 생각을 자주 바꾸고 돈을 잃는 것을 싫어한다”며 “그가 기고문을 보낸 날 돈을 잃었던 것 같다”며 날선 공방을 이어갔다. 베선트 장관은 지난달 31일(현지시간) 노스캐롤라이나주 애슈빌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 회의에서 기고문이 게재된 이후 드러켄밀러와 직접 대화를 나눴다며 대화는 “괜찮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 채권시장은 가장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드러켄밀러의 기고문은 미국 금융시장에서 흔히 나오는 여느 전문가들의 진단과는 화제성부터 다르다. 미국 국채 바이백 규모 확대 조치를 발표한 베선트 장관부터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수장이 된 케빈 워시 의장까지 모두 드러켄밀러 밑에서 금융시장 경험을 쌓았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 경제 사령탑에 있는 수장들이 모두 드러켄밀러의 제자인 셈이다.
부모 이혼으로 갈라진 가족…순탄치 않았던 유년시절
1953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 태어난 드러켄밀러는 중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공립학교 여섯 곳을 옮겨 다녔고, 9학년이 돼서야 사립 통학학교에 정착했다.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그의 아버지는 듀폰에서 근무하며 노사관계 업무를 담당했다. 하지만 잦은 전근으로 드러켄밀러 역시 어린 시절 여러 지역을 옮겨 다녀야 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아버지가 다시 전근을 가게 되자 리치먼드 지역 네 가정이 번갈아 드러켄밀러를 돌봐줬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컬리지엇 스쿨에서 친구들과 함께 졸업할 수 있었다.
드러켄밀러가 유년 시절 겪은 부모의 이혼도 그의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어머니의 외도로 부모가 갈라선 뒤 두 여동생은 어머니를 따라갔다. 드러켄밀러는 6살 때부터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며, 이후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새어머니와 함께 생활했다.
드러켄밀러는 “당시에는 크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부모가 자녀들을 나눠 키운 것이 얼마나 특이한 일이었는지 나중에야 알게 됐다”며 “그 경험이 스스로 성공해야 한다는 욕구를 키웠는지도 모른다”고 회고했다.
아이비리그도 아닌 非상경계열 출신…투자에 눈 뜨기까지 걸린 시간 6년
드러켄밀러는 여느 유명 펀드매니저들과는 달리 미국 동부지역의 명문 대학인 아이비리그 출신은 아니다. 게다가 입학 당시 전공은 상경 계열도 아니었다.
1971년 메인주의 보든대에 입학한 드러켄밀러는 처음에는 영문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학교에 다니면서 영문학이 자기 적성에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대로 영문학을 계속 전공하면 다른 학생들과 경쟁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드러켄밀러는 대학교 3학년이 돼서야 경제학에 남다른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후 경제학을 복수전공해 1975년 영문학과 경제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졸업했다.
학사학위를 받은 이후 경제학을 좀 더 심층적으로 배우고 싶다는 열망으로 미시간대 경제학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하지만 대학원에서 특정 학문을 심층적으로 공부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도 이내 깨달았다. 결국 경제학 박사과정을 두 학기도 채우지 못하고 미시간대를 중퇴했다.
드러켄밀러는 결혼 후 첫 아내의 고향인 피츠버그로 이주했다. 이 곳에서 그는 금융업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그가 도전장을 내민 곳은 피츠버그 내셔널뱅크(PNC)와 멜론뱅크였다. 비록 멜론뱅크에서는 채용 제안을 받지 못했지만 PNC의 기업대출 책임자였던 톰 오브라이언의 눈에 들어 1977년 경영 연수 프로그램으로 입사할 수 있었다. ‘금융인 드러켄밀러’의 인생이 첫 막을 올린 순간이기도 하다.
PNC에 재직하면서 드러켄밀러는 자신이 어디에 재능이 있는지 찾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은행 내 주요 승진 경로로 여겨졌던 기업대출 업무에 염두를 뒀지만 곧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 당시 여신부 책임자가 드러켄밀러에게 “알래스카에 다른 교통수단이 하나도 없어도 자네는 스노모빌을 팔지 못할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의 영업 능력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았다.
드러켄밀러가 천부적인 재능을 드러낸 분야는 다름 아닌 ‘투자’였다. 그가 아직 20대였을 때, 직장에서 자신에게 보고하던 직원 상당수가 30대 후반의 미국 경영학 전문 석사 학위(MBA) 출신이었다.
당시 신탁부의 투자를 담당하던 스페로스 드렐레스는 숫자와 성과를 중시하는 드러켄밀러의 성향을 알아봤다. 훗날 그는 드레켄밀러 인생의 첫 멘토가 됐다.
누구도 나보다 더 많이 일하지 못했다. 내가 특별히 근면해서가 아니라 이 일을 누구보다 좋아했기 때문이다.
사업 위기에도 공격투자…수익률 40% 승승장구
드러켄밀러가 피츠버그 내셔널뱅크에 입사한 지 14년에 접어든 1981년, 자신이 그간 모아둔 자본을 기반으로 헤지펀드 ‘듀케인캐피털매니지먼트(이하 듀케인 캐피털)’를 설립했다. 다만 그는 회사를 그만두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헤지펀드 사업을 운용하는 등 직장생활과 개인사업을 병행했다.
드러켄밀러도 사업 초기에는 회사 존폐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위기를 겪었다. 당시 듀케인 캐피털의 초기 고객은 2명, 운용자산은 80만달러에 불과했다. 운용보수는 1%에 그쳤다. 이 정도 수익으로 회사를 유지할 순 없었다. 그나마 한 투자자가 매달 1만달러를 지원한 덕분에 회사는 가까스로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드러켄밀러에게 1만달러를 지급하던 투자자가 대규모 금융사기에 연루되면서 듀케인 캐피털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문제의 투자자는 사실상 자기자본 없이 약 80억달러 규모의 채권을 사들였고 이후 체이스은행에서 2억5400만달러를 사취한 혐의로 수감됐다. 이로 인해 듀케인의 안정적인 수입원도 사라졌다.
언제든 회사가 문을 닫을 수 있었던 상황이었지만 드러켄밀러는 이를 전화위복으로 삼았다. 당시 회사에는 드러켄밀러와 보조직원 한 명만 남았을 정도로 재정 상태가 참담했지만, 그는 오히려 공격적으로 투자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경제학 지식과 주식 리서치 경험을 바탕으로 개별 종목보다 거시경제 흐름에 베팅하는 글로벌 매크로 전략을 구사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드러켄밀러는 1981년부터 1985년까지 연평균 42%라는 경이로운 수익률을 기록했다.
드러켄밀러의 탁월한 투자 수완은 월가에 빠르게 퍼졌다. 뛰어난 성과는 자산운용사 드레퓌스의 눈길을 끌었다. 드러켄밀러는 드레퓌스로부터 복수의 펀드 운용을 맡았고, 동시에 자신의 듀케인 캐피털도 운영했다. 두 회사를 관리하던 와중에도 드러켄밀러가 맡은 펀드 하나는 3개월 만에 40%의 수익률을 달성하기도 했다.
탁월한 수완으로 월가에서 명성을 높인 만큼 결혼 운도 따랐다. 드러켄밀러는 1988년에는 드레퓌스의 선임 증권 애널리스트였던 피오나 캐서린 빅스와 두번째 결혼을 했다.
소로스매니지먼트서 베선트와 한솥밥…英은행 굴복시킨 일등 공신들
드러켄밀러의 명성은 당시 월가의 전설적 투자자로 꼽히던 조지 소로스에게까지 전해졌다. 결국 그는 소로스의 눈에 띄어, 결혼식을 올린 그해 소로스가 이끄는 소로스펀드매니지먼트에 합류했다. 이곳에서 드러켄밀러는 12년간 수석 전략가로 활동하는 동시에 듀케인 캐피털도 계속 운용했다. 베선트 장관과의 인연도 이때 시작됐다.
사실 베선트가 소로스펀드매니지먼트를 통해 금융계에 발을 놓게 된 결정적 배경에는 드러켄밀러가 있다. 당시 예일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던 베선트에게 금융은 생소한 분야였다. 하지만 당시 소로스펀드매니지먼트의 최고투자책임자(CIO)였던 드러켄밀러는 시장의 구조적 비효율성을 포착하는 베센트의 날카로운 감각을 높이 샀다. 이렇게 드러켄밀러는 베선트를 회사의 리서치 애널리스트 겸 매크로 트레이더로 영입하게 된다.
소로스펀드매니지먼트에서 드러켄밀러와 베선트는 거시 경제 투자(매크로 트레이딩) 분야에서 긴밀히 협력했다. 1992년 9월에 발생한 이른바 ‘검은 수요일(영국 파운드화 공매도 사태)’ 사태에서 일주일 만에 무려 10억달러의 수익을 올린 일화는 유명하다.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의 무릎을 꿇렸다.’
검은 수요일 사태는 소로스의 단독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질적인 설계자와 아이디어 제공자는 드러켄밀러였다. 드러켄밀러와 소로스는 영국 파운드화의 고정환율 체제가 유지되기 어렵다고 판단, 대규모 매도에 나서 이 같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여기서 베선트 장관은 영국 경제의 기초 여건(펀더멘털)에 관한 핵심 연구를 제공하며 공매도작전에 뒷받침한 것으로 알려졌다.
소로스의 퀀텀펀드를 운용하는 동안 드러켄밀러는 자신의 투자 전략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었다. 이후에는 엔비디아, 쿠팡, 마이크로소프트 등에 상당한 자산을 배분했고, 전통적인 기술주뿐 아니라 금광업체와 AI 관련 주식에도 투자했다.
듀케인캐피털 닫고 본인 자산 운용사 설립…워시와 인연도 여기서 시작
1000억달러를 운용해 8%의 수익률을 내고 엄청난 수수료를 버는 것보다 작은 펀드로 매년 30%를 버는 편을 택하겠다. 나는 거대한 자산을 운용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업계 최고의 수익률을 내고 싶었다
드러켄밀러가 2000년 소로스펀드매니지먼트를 떠난 뒤에는 듀케인캐피털매니지먼트 운용에 전념했다. 듀케인캐피털이 2010년에 들어 외부자금 운용을 종료할 당시 운용자산은 120억달러(약 16조원)를 돌파했다. 30년간 듀케인캐피털매니지먼트를 운용하면서 단 한 해도 손실을 내지 않고 연평균 30%의 수익률을 기록하는 경이로운 성과를 낸 것이다.
드러켄밀러는 운용자산 규모보다는 수익률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그러면서 정든 듀케인캐피털을 청산한 것에 대해 “30년 동안 고객의 돈을 운용하는 책임을 맡아왔고 그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며 “30년이면 충분하다”고 블룸버그통신에 전했다.
드러켄밀러는 듀케인캐피털을 청산한 뒤 자신의 자산만 관리하는 ‘듀케인패밀리오피스’를 운영했다. 연준 의장으로 세계 금융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워시와의 인연도 여기서 시작됐다.
때마침 워시는 2006년 연준 이사를 역임하다 정책 이견으로 2011년에 사임했던 시기였다. 듀케인패밀리오피스는 운영을 시작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아 유능한 파트너가 필요하던 참이었다. 이렇게 워시는 그해 듀케인패밀리오피스 파트너이자 고문으로 합류했다.
WSJ에 따르면 워시 의장은 드러켄밀러의 밑에서 10년 넘게 일하며 경제 분석 및 투자 관련 멘토링을 받았다. 사무실에서 이들의 자리 또한 3m에 불과했을 정도로 가까웠다. 같은 자리에 없을 땐 하루에 10차례 이상 통화를 나눌 정도로 교류가 잦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워시가 드러켄밀러와 함께 일했던 경험은 그가 연준 의장으로 지명된 데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 트루스소셜을 통해 워시 의장 지명을 발표하면서, 그가 “스탠리 드러켄밀러와 함께 듀케인패밀리오피스 LLC의 파트너로 일하고 있다”고 직접 소개하는 등 워시의 경력과 역량을 높이 평가했다.
드러켄밀러 역시 워시가 연준 의장에 지명되기를 바란다는 뜻을 월가에 공개적으로 내비쳐왔다고 WSJ는 전했다. 동시에 자신의 또 다른 제자인 베선트 장관과 워시 의장이 함께 일하게 된 데 대해서도 기대감을 드러냈다.
데이터·경제지표 중시하는 워시…드러켄밀러 작품이었다
드러켄밀러는 워시 의장과 10년 넘게 함께 일하며 그를 단순한 ‘정책 전문가’를 넘어 시장 경험을 갖춘 글로벌 매크로 전략가로 성장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 워시 의장이 연준의 통화정책에서 이른바 ‘점도표(dot plot)’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에 비판적이고, 데이터와 시장 움직임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는 입장을 갖게 된 데에도 드러켄밀러의 영향이 컸다는 후문이다. 드러켄밀러는 오랫동안 정부의 과도한 차입과 인플레이션을 경계해왔으며, 물가 안정을 위해 경기침체까지 감수했던 폴 볼커 전 연준 의장을 높이 평가해왔다. 워시가 드러켄밀러 밑에서 오랜 기간 시장과 데이터 중심의 판단 방식을 익힌 만큼 정치적 요구보다 경제 여건을 우선할 가능성이 있다는 기대가 나오는 이유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베선트 장관과 워시 의장이 드러켄밀러와 마치 ‘아버지와 아들 같은 관계’로 묘사되기도 할 정도로 시장과 경제 정책을 해석하는 드러켄밀러의 관점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고 전했다. 드러켄밀러가 지금도 이들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가 세계 경제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인물로 추대할 때가 됐다고 평가다.
케빈 워시 연준 의장과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은 모두 드러켄밀러의 언어를 빌려 입장을 전한다.
기부도 ‘파격적’…73세의 현역 투자자
월가에서 전설적인 투자자로 이름을 떨친 드러켄밀러는 대규모 기부와 적극적인 자선활동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그는 졸업한 지 수십 년이 지난 뒤인 1997년 자신의 모교인 보든대 과학관 개보수를 위해 3650만달러를 기부했다. 이후에는 아내 피오나와 함께 자신들이 설립한 ‘드러켄밀러 재단’에 7억500만달러(약 8000억원)를 기부하며, 2009년 미국에서 가장 많은 금액을 기부한 자선가 1위에 오른 바 있다.
드러켄밀러가 그간 보여준 ‘집중 투자’ 철학은 자선활동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드러켄밀러와 아내 피오나는 전체 기부금의 약 95%를 자신들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5~6개 기관에 집중했다. 대표적인 지원 대상은 교육·빈곤퇴치 단체인 할렘 칠드런스 존(HCZ)과 메모리얼 슬론 케터링 암센터 등이 대표적이다.
드러켄밀러는 자선사업에서도 결국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기부에 대해서도 거창한 도덕적 명분을 내세우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드러켄밀러는 “나는 이기적인 이유로 기부한다. 내가 번 돈으로 나와 같은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의 삶을 바꾸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라며 “큰돈을 쓰고도 아무런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면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기부에서도 철저히 성과를 중시한다고 밝혔다.
그는 “주식투자와 마찬가지로 적절한 분야에서 훌륭한 리더를 찾아내고 그 사람과 함께 가야 한다”며 “조정이 오거나 새로운 기회가 생길 때마다 훌륭한 리더를 더 지원하고 그들이 올바른 판단을 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덧붙였다.
올해로 73세인 드러켄밀러는 아직까지도 은퇴할 생각이 없다. 그는 여전히 금융업계에서 광폭행보를 보이고 있다. 현재에도 듀케인패밀리오피스의 회장 겸 최고투자책임자(CIO)로 활동하고 있으며, 수십억달러에 달하는 개인 자산을 직접 활발하게 운용 중이다.
내가 하는 일을 너무 좋아해 은퇴하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살아있다면 90대까지도 계속할 것 같다.
yckim6452@heraldcorp.com
![프롬프트의 신법 [‘오늘’에 대한 우리 이야기]](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6/09/01/news-p.v1.20260901.203c531a96884d4da174595cad521d59_T1.png?type=h&h=240)
![자산가의 저력은 하락장서 나타난다…위기 속 기회 찾는 ‘힘’ [큰손 따라잡기]](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6/08/31/news-p.v1.20260831.a0fa168d036d4658b6cb03a0502c0de4_T1.jpg?type=h&h=240)
![“고3 딸 학원비 40만원만” 끝내 외면한 전처…자식 마저 버린 ‘나쁜 부모’와 싸우는 그들 [세상&플러스]](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6/08/29/news-p.v1.20260829.87d95bef732846b383020b75a70f53a5_T1.png?type=h&h=2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