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세계 1위 경제 규모가 된 시기는 대략 19세기 후반이다. 하지만 그 후에도 한동안 국제 정치·금융의 중심은 여전히 런던이었고 기축통화도 파운드화였다.
미국이 이를 뒤집고 명실공히 세계 경제 1위국으로 올라선 계기는 제1차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다. 미국은 2개의 대형 전쟁을 통해 유럽에서 물자를 빌리는 나라에서 물자를 받아내는 세계 최대 규모의 채권국으로 전환되면서 향후 맞이할 냉전시기의 초강대국 지위를 확보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인 1944년에는 44개 연합국 대표들이 브레튼우즈 협정을 통해 금 1온스를 35달러로 고정시키며 미국 달러를 세계 유일의 금 태환 기축통화로 지정했다. 경제, 금융적으로도 완벽한 세계 1위가 된 것이다.
물론 고정환율제인 브레튼우즈 체제는 미국이 재정수지 적자로 금 추가 확보 없이 마구 달러 발행을 늘리다가, 1971년 결국 닉슨 쇼크로 달러화의 금태환 정지를 선언하면서 무너졌지만, 그 때 설립된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은 현재도 여전히 활동하면서 미국 중심의 세계경제금융질서는 계속되고 있다.
아카데미와 그래미 탄생의 계기
미국은 세계 1위의 경제대국이 되어도 마음이 뭔가 ‘허’했다. 서유럽인 중심의 이민자들이 새로운 땅에서 세계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지만, 돈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다. 한마디로 문화가 필요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문화 헤게모니’가 필요했다. 그 두 개의 수레바퀴는 영화와 음악이다. 그러니 영화와 음악의 자부심을 대외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이벤트가 당연히 만들어져야 했다.
영국도 ‘젠트리’라는 새로운 유산 계층이 성장하면서 산업혁명을 가장 먼저 완수하고, 스포츠와 연극과 오페라 관람 등 문화활동으로 교양과 명예, 체면을 중시하는 ‘젠틀맨’이 된 현상과 궤를 같이 한다.
아카데미 시상식과 그래미 어워드는 그런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만들어져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두 시상식을 전세계로 내보내는 방송을 통해 그런 우월감의 정서를 확인한다.
둘 다 ‘아카데미’가 주최한다. 아카데미 시상식은 스튜디오가 영화 제작과 배급, 상영의 모든 과정을 통제하여 수익을 극대화하는 ‘미국영화 스튜디오 시스템’이 확립되기 시작한 1929년 만들어져 올해 98회가 진행됐다. 영화업계 전문종사자가 회원으로 있는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AMPAS)가 주최한다.
세계 대중음악 시장 규모 1위인 미국의 대중음악 시상식인 그래미 어워드는 1959년부터 시작돼 올해 68회가 진행됐으며, 전미 레코딩 예술 과학 아카데미(NARAS)가 주최한다.
이런 역사적 맥락을 고려한다면 아카데미 시상식과 그래미 어워드는 필연적으로 ‘로컬’이 될 수밖에 없다. 외국인 동종업계 사람들을 심사에 일정 비율 참여시킨다 해도 미국 중심적이다. 하지만 영화나 대중음악의 세계적 영향력 등을 감안하면 두 시상식이 적용한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로컬’이라는 기준은 편협하다는 의견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미국이 두 개의 대형시상식을 주관하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로컬’과 ‘흥행(이슈, 화제, 비즈니스)’, 이 두가지인 것 같다. 가능하면 미국인에 의한 영화와 음악을 우선시한다.
1967년부터 영화 감독을 하며 수많은 히트작을 탄생시킨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64세가 된 2006년 ‘디파티드’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첫 수상한 것도 부모가 이탈리아계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덩달아 ‘갱스 오브 뉴욕’ 등에 출연하며 스코세이지 감독의 페르소나로 활약해온 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도 코와 턱선, 눈매가 날카롭던 젊은 시절을 지나 후덕한 아저씨 모습으로 극한의 연기를 보여준 실화 바탕 생존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5)에서야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을 수 있었다.
봉준호 감독도 불리함을 딛고 영화 ‘기생충’으로 2020년 2월 9일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영화상 등 4관왕을 달성했다. 그는 시상식 직전까지 수많은 직능별 시상식과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영화를 홍보했다. 미국사람이라면 영화만 잘 만들면 되지만, 한국감독이 아카데미상을 받으려면 영화만 잘 만들어서는 안된다.
봉 감독은 영화비평가협회, 배우 조합, 작가 조합 등 수많은 영화 직능별 시상식에 참가하며 “아카데미는 로컬이다”, “자막의 1인치 장벽을 넘으면 훨씬 더 다양한 영화를 즐길 수 있다”는 등 세련된 유머가 들어간 레토릭을 구사해, 좋은 인상을 남겼다.
사실 봉 감독의 이 두 발언을 거칠게 요약하면 “영화 잘 만들었으니, 나에게 상 좀 줘~”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은근하게, 그러면서도 강렬하게 어필해야 한다. 물론 배급사 CJ ENM을 대표하는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이 많은 작업을 해놓았던 덕을 봤지만, 봉준호 감독 자신도 국뽕스러운 멘트가 아닌 세련된 화법을 구사해 레토릭의 승리라는 소리를 들을만 했다.
방탄소년단의 그래미 보이콧 사건, 주최측의 로컬성과 흥행성의 충돌?
2026년 6월 그래미 어워드 주최측이 ‘아시안 팝’(베스트 아시안 팝 뮤직 퍼포먼스) 부문을 신설한다고 발표하자, 방탄소년단(BTS)이 이에 반발해 지난 7월 전격 출품 거부를 선언했다.
군대 전역 후 완전체로 복귀해 정규 5집 ‘아리랑’으로 글로벌 흥행을 이어가던 BTS는 “음악이 지역이나 언어로 구분되기보다 음악 그 자체로 들리고 사랑받기를 바란다”며 차별적인 그래미 어워즈를 간결하고 부드러운 언어로 강하게 비판했다.
그래미는 BTS의 출품 거부 선언 이후 공식 홈페이지에서 BTS의 2021년 ‘Dynamite’ 및 2022년 ‘Butter’ 그래미 단독 무대 영상을 삭제하는 등 보복 논란이 확산됐다. 이에 아미들의 글로벌 연대와 서구 사회의 차별적 시선을 담은 ‘아리랑’의 수록곡 ‘Aliens’를 음원 차트에서 역주행시키며, 그래미에 점잖게 항의하는 BTS와 연대했다.
그래미 측은 하비 메이슨 주니어 CEO가 직접 나서 “(BTS의) 결정을 존중하지만 편 가르기 위함은 아니었다”면서 “신설된 아시안 팝 부문이 아티스트들을 제대로 대표하고 있는지 하이브를 비롯한 아시아 음악계와 다시 논의하고 재검토하겠다”며 꼬리를 내린듯한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재검토 의사 발표 이후 아직 별다른 조치는 나오지 않은 상태다. 여기까지가 BTS의 그래미 어워즈 보이콧 사태의 개요다.
필자는 그래미 어워드가 전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음악 시상식임에도 ‘로컬’과 ‘흥행’(이슈, 화제)을 중요한 요인으로 감안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래미는 음악을 잘하는 아티스트중에서 이왕이면 미국인이고, 거기에 흥행 포인트가 있는 아티스트를 선호한다.
여자 솔로가수는 테일러 스위프트, 빌리 아일리시, 올리비아 로드리고, 사브리나 카펜터 등 미국인을 그래미는 좋아한다. 두아 리파만 해도 알바니아계 부모를 둔 영국인이다.
2026 그래미 어워드는 지난 2월 2일 열렸다. 장르에 관계없이 통합적으로 수여하는 최고의 본상 ‘제너럴 필드’의 올해의 레코드는 켄드릭 라마(Luther), 올해의 앨범은 배드 버니(DeBÍ TiRAR MáS FOToS), 올해의 노래는 빌리 아일리시(WILDFLOWER)가 각각 수상했다.
모두 과거에도 상을 받았던 아티스트들이다. 특별히 빛을 발한 아티스트가 없다면 선의의 ‘가치’를 만들어낸 미국 아티스트들에게 또 줄 수 있다. ‘노래하는 마르틴 루터 킹’ 켄드릭 라마와 환경운동을 실천하며 전세계 MZ세대의 불안과 우울을 대변하는 빌리 아일리시가 그렇다.
중남미 대표 가수 배드 버니의 그래미 수상은 시장성 감안?
하지만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미국가수 배드 버니는 좀 특수한 케이스다. 그래미가 우선시하는 ‘로컬’에는 해당이 되지 않지만, ‘흥행성’에는 크게 도움이 되는 아티스트다. ‘로컬’과 ‘흥행’이 충돌한 경우다.
배드 버니의 ‘DeBÍ TiRAR MáS FOToS’는 전곡이 스페인어로 된 앨범으로는 처음으로 그래미의 ‘올해의 앨범’ 상을 수상했다. 그는 수상소감도 통역 없이 스페인어로 말하기를 즐긴다.
배드 버니는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의 강압적인 단속 작전을 줄곧 비판해왔다. 이번 수상소감에서도 스페인어로 “꿈을 좇기 위해 조국과 나라를 떠나야 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이 상을 바치겠다”고 말했다.
배드 버니의 ‘DeBÍ TiRAR MáS FOToS’ 앨범은 사랑과 가족, 사랑하는 사람들이 키워드이자 앨범 정서다. “증오는 많을수록 강력해지고 그보다 강한 건 사랑 뿐이다. 우리가 싸워야 한다면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운동권 아티스트다.
그는 지난 2월 열린 미국 프로풋볼NFL 결승전 슈퍼볼 하프타임쇼에서도 스페인어 가사로 채워진 무대를 선보였을 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SNS에 “정말 끔찍했던 역대 최악의 공연”이라고 쏘아붙였다.
그래도 배드 버니는 중남미를 대표하는 아티스트다. 스포티파이에서 한 해에 가장 많이 스트리밍되는 가수로 자주 뽑힌다. 중남미는 영국과 북미 등 영어권보다 인구가 더 많다.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를 구사하지만 단일 문화권의 시장이다.
그래서 중남미에서 히트하면 바로 미국의 주류(메인스트림)로 들어온다. 그러니 그래미는 베키 지(3세대 멕시코계 미국인), 카롤 지(콜롬비아), 루이스 폰시(푸에르토리코) 등 라틴팝을 부르는 아티스트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이번 BTS의 그래미 보이콧 사태에 스페인 언론들이 과거 ‘라틴 그래미’ 분리 때와 마찬가지로 미국 백인 중심주의적 편협함을 지적하며 BTS에게 지지를 보내기도 했다. 프랑스의 온건주의 유력지 르 피가로도 “아시아 음악 전체를 하나로 묶은 것은 모욕적이고 인종차별적”이라며 그래미를 비판했다.
방탄소년단 그래미 보이콧 선언 이후
방탄소년단의 그래미 보이콧 사건도 따지고 보면, 이 두 가지가 충돌한 케이스다. ‘로컬’과는 거리가 멀어 주류 시상종목에서 벗어난 ‘아시안 팝’ 장르를 신설하면 그냥 넘어갈 줄 알았는데, 아티스트 본인은 물론이고 글로벌 팬덤(아미)의 역공 또한 만만치 않다.
방탄소년단은 그래미의 아시안 팝 신설 발표 이전만 해도 항상 최종 목표가 그래미였다고 계속 말해왔다. 그만큼 그래미를 받고싶어했다. 하지만 그래미가 K-팝과 아시아의 노래를 주류장르(제너럴 필드)에서 배제하고 따로 상을 주는 ‘인종 분리책’을 발표하자, BTS가 이 차별적인 정책에 수동적으로 따라가지 않고 직접 문제 제기를 하며 답을 얻어내게 됐다.
이미 캐나다 출신의 래퍼 드레이크를 비롯해 위켄드, 카니예 웨스트, 저스틴 비버, 시네이드 오코너, 프랭크 오션 등이 그래미 참가를 거부한 바 있다. 이 중에는 ‘상 못받을 것 같으니까 안나가는’ 사적 감정이나 노이즈 마케팅이 작용한 불참 케이스도 있지만 그래미가 일부 영미 팝스타들로부터도 공정성을 의심받는 시스템이라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BTS는 사적 감정이 아닌, 대의명분에 맞는 불참을 선언했다. 이번 보이콧으로 그래미 정책이 수정되지는 않더라도, 영어가 많이 포함된 방탄소년단의 노래가 기존 카테고리 내에서 시상 대상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럴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반쪽 그래미’라는 국뽕성 제목은 절제하자. 그러지 않아도 이미 그래미의 편협성은 충분히 드러났다. 또한, 방탄소년단은 할 말을 하면서도 성숙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anju1015@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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