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큰증권 정책방향’ 뜯어보기
미국 증시가 문을 닫은 뒤에도 엔비디아 주식은 거래됩니다. 증권사 애플리케이션이 아닌 코인 지갑을 통해서입니다.
코인베이스는 지난달 말 자체 토큰화 주식을 출시했습니다. 블록체인 ‘베이스(Base)’에 애플·엔비디아·메타·알파벳 주식을 토큰 형태로 올렸습니다.
티커 뒤에 ‘c’가 붙은 NVDAc, AAPLc 같은 토큰 하나는 실제 주식 한 주와 1대 1로 연동됩니다. 기초 주식은 미국 증권사 알파카가 별도 신탁 계좌에 보관하고, 투자자는 토큰만 지갑에 넣어두면 됩니다.
장 마감도, 주말도, 공휴일도 없습니다. 지갑 속 토큰은 디파이 대출 서비스에 담보로 맡겨 스테이블코인을 빌리는 데도 쓸 수 있습니다. 코인베이스는 아부다비에 세운 법인을 통해 미국 외 투자자에게 이를 팔고 있습니다.
7월 출범한 로빈후드 체인의 주식 토큰 시가총액은 8월 한 달 새 3.7배 늘어 1억달러를 넘어섰을 정도입니다. 주식이라는 가장 익숙한 자산이 24시간 거래되는 세상이 본격 열리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요. 지난 4일 금융위원회가 내놓은 ‘토큰증권 정책방향’이 그 답입니다. 핵심은 과거 ‘조각투자’ 방식에 머물지 않고, 한국 역시 토큰증권의 범위를 주식·채권·펀드까지 확장해 글로벌 경쟁력을 구축하겠다는 것입니다.
토큰증권(STO) 무엇일까
토큰증권은 블록체인(분산원장) 장부에 기재돼 발행·유통되는 증권을 의미합니다. 종이나 전자등록부 대신 블록체인이라는 장부에 자산의 권리를 기록하는 것입니다. 실물로 발행·유통되는 실물증권, 전자적 방식으로 유통되는 전자증권 등과 ‘형태적’으로 차이를 갖습니다.
기존 전자증권의 경우 기관별 독립적인 시스템에서 단독으로 전자등록계좌부를 관리했다면, 토큰증권은 다수의 참여자가 분산원장 네트워크에 참여해 전자등록 정보를 공동기재하고 관리합니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미술품, 부동산 같은 비정형 자산을 쪼개 파는 조각투자를 중심으로 토큰증권 제도가 설계돼 왔습니다. 조각투자의 경우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기존 시스템과 복잡한 연계작업이 불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글로벌 시장에서 기존 정형증권(주식·채권·펀드) 토큰화 관련 논의가 활발해지자 최근 금융위는 정책방향을 내놓고, 정형증권의 토큰화 인프라 구축을 함께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토큰증권은 분산원장에 맞는 신규 인프라 구축이 기반돼야 합니다. 증권사 등이 토큰증권 발행을 위한 분산원장(메인넷) 인프라를 구축해야하고, 이를 전자등록기관인 예탁결제원의 토큰증권 시스템과 연계해야 합니다. 보다 복잡한 시스템 마련이 필요한 만큼, 3단계 로드맵을 마련해 점진적으로 시행하기로 했습니다.
우선 1단계에서는 ➀펀드·채권의 경우 기관투자자 전용 사모방식 증권의 토큰화를 먼저 추진하고, ➁주식은 비상장주식을 신탁방식으로 토큰화하기로 했습니다.
신탁방식이란 전자증권으로 발행된 비상장주식을 예탁원 또는 신탁업자에 신탁하고, 이들이 토큰증권 형태의 비상장주식 신탁 수익증권을 발행하는 방식으로, 전자증권과 토큰증권의 하이브리드 방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존 주식의 의결권·배당 등 권리는 전자증권 시스템에서 관리하고, 토큰증권 인프라에서는 신탁수익증권의 권리를 관리하게 됩니다.
또 ➂상대적으로 토큰화가 용이한 조각투자의 경우에는 1단계부터 공모 조각투자증권의 토큰화가 허용됩니다.
1단계는 시스템 안정성과 시장 수요를 점검하는 일종의 테스트베드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로드맵 2단계에선 1단계의 성과를 바탕으로, 공모 증권으로 토큰화 범위를 본격 확대합니다.
최종 3단계는 스테이블코인 등을 결제 수단으로 활용해 증권과 결제가 모두 블록체인 위에서 처리되는 ‘온체인(On-chain) 결제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심수빈 키움증권 연구원은 “2023년부터 정형증권의 토큰화 가능성은 열려 있었지만 구체적인 시점이나 내용이 부재했던 반면, 올해는 정책을 통해 우선 적용할 상품과 구현 방식, 이후 공모증권으로 확대하는 순서가 구체화됐다”며 “1단계 제도 시행 이후 상품의 발행 규모뿐 아니라 안정성·효율성 및 시장 수요가 어느 수준에서 확인되고, 이를 바탕으로 2단계 공모증권 토큰화로 얼마나 빠르게 확장되는지가 주요 변수”라고 말했습니다.
고가의 자산 쪼개 공동 소유·수익 배분?
이번 정책방향에는 조각투자와 관련된 방향성도 담겼습니다. 조각투자는 기초자산을 다수 투자자가 나누어 투자할 수 있도록 증권화한 것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 기초자산의 신탁을 이용한 ‘비금전신탁수익증권’과 신탁 없이 공동사업의 손익을 배분하는 ‘투자계약증권’으로 구분됩니다. 부동산·음원 등 신탁가능한 기초 자산을 나누어가지는 개념은 비금전신탁수익증권에 해당합니다.
투자계약증권은 신탁이란 매개 수단 없이 직접 공동사업의 손익을 배분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한우, 한돈 등 공동사업에 금전을 투자하고, 타인이 수행한 공동사업의 결과에 따른 손익을 귀속받는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비금전신탁의 경우 기준을 충족하면, 여러 기초자산을 묶어 하나의 조각투자증권으로 발행이 가능해집니다. 개별 규모가 작아 증권화가 어려웠던 자산의 상품화 길이 열리게 된 셈입니다.
다만, 투자자 보호를 위해 1인당 청약한도(예 3000만원과 발행금액의 5% 중 적은 금액)를 두고, 일반투자자 배정 등 특정인 몰아주기 방지를 제한하는 가이드가 마련됐습니다.
반면, 투자계약증권의 경우 현행 개별 심사 체계를 유지하되, 연구용역을 통해 추가검토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윤유동 NH투자증권 연구원은 “기존 조각투자 발행은 미술품, 부동산, 한우, 한돈 위주로 이루어졌는데, 기초자산별로 청약 성과는 상이했다”며 “향후 신종증권시장과 장외거래소 등 다수의 유통 플랫폼이 출범하는 만큼 우량 기초자산 선별이 흥행을 가르는 요소로 작용할 것으로 판단된다”고 분석했습니다.
토큰증권을 취급하기 위해서 별도 인가를 요구하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기존 금융투자업 인가가 있다면, 별도의 인가를 받지 않아도 금융투자업 범위 내에서 토큰증권도 취급할 수 있습니다.
다만, 토큰증권 발행·유통의 안정성 등은 전자등록기관인 예탁원이 적절성을 심사합니다.
일각에서는 이번 토큰증권 정책방향의 중장기적 수혜자로 증권사를 꼽았습니다. 금융위가 별도의 토큰증권 라이선스를 만들지 않고, 기존 투자매매·중개 인가 범위에서 토큰증권 취급을 허용하기로 했다는 점 때문입니다. 기존 증권업의 업무가 토큰증권 인프라로 이전되는 방향에 가깝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김세희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예탁결제원의 역할 확대가 가장 직접적이나 투자 대상이 아니기에 국내 주식시장에서는 증권사가 가장 현실적인 중장기 수혜 업종으로 판단된다”며 “특히 기존 증권사의 토큰증권 취급을 허용한 현 제도 아래에서는 신규 플랫폼이 독자적인 유통·라이선스 프리미엄을 확보하기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미국과 다른 점…나아갈 방향은
다만, 이번 정책방향을 두고 증권가에서는 다소 보수적인 정책이란 평가가 나옵니다.
우선 1단계 로드맵에서 추진되는 대상이 한정돼있고, 금융위가 2·3단계의 구체적 시행 시점 또한 확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분산원장 참여자를 제한하는 등 사실상 폐쇄적인 구조를 요구한 점 등도 한계로 지적됩니다.
김지원 KB증권 연구원은 “이번 정책방향으로 국내 토큰증권 시장은 조각투자 중심의 제도 실험에서 기존 자본시장 상품과 인프라를 토큰 방식으로 전환하는 단계로 진입하게 됐다”며 “다만 법 시행과 동시에 모든 증권이 토큰화되거나 온체인에서 자유롭게 유통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초기에는 기관용 사모상품과 권리구조가 비교적 단순한 증권부터 도입되고, 예탁결제원의 분산원장 심사와 기존 인가체계 안에서 시장이 형성될 전망”이라며 “이에 따라 금융사의 경쟁력도 독자적인 블록체인 보유 여부보다 제도요건을 충족하는 원장 운영, 정형증권의 반복 발행 및 기존 계좌 결제 시스템과의 연계 능력에서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습니다.
유진투자증권은 한국의 시행 방향을 미국 사례와 비교·분석했습니다. 미국은 기존 증권 체계는 그대로 둔 채 그 위에 다양한 토큰화 통로를 열어준 반면, 한국은 법률상 증권장부 자체를 블록체인으로 바꾸려고 한다고 평가했습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올해 1월 토큰화 증권을 다양한 구조로 정의했습니다. 크게 발행인 또는 대리인이 자신의 증권을 토큰화하는 발행인 주도(Issuer-Sponsored)와 제3자가 기존 증권을 토큰화하는 방식으로 나눴습니다.
후자의 경우 다시, 실제 주식에 대한 권리를 온체인으로 옮기는 수탁형(Custodial) 모델과 원증권에 대한 직접적인 권리 없이 경제적 성과를 추종하는 합성형(Synthetic)으로 나눠 세분화했습니다.
반면, 한국은 분산원장 자체를 법적 효력이 있는 증권계좌부로 편입하는 접근으로, 토큰과 증권 권리의 연결을 보다 강하게 설계했다는 분석입니다. 한국에서는 원장 간 이동이 단순한 기술적 전송이 아니라 권리의 소멸·이전·최종성을 함께 관리해야 하는 문제가 되며, 초기 단계에서 원장 참여자와 시스템 안정성, 기록의 정합성을 강하게 통제하는 방식이라는 것 입니다.
김세희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현재의 폐쇄적 구조가 장기화될 경우 토큰화의 효용이 발행·관리에 머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향후 다른 원장과 연결할 수 있는 확장성을 초기 설계부터 확보할 필요가 있다”며 “결국 토큰증권의 성패는 발행건수보다 기존 주식·채권·펀드 중 얼마나 많은 자산이 토큰화 인프라로 전환되고, 이후 결제·담보 등에 얼마나 활용되는지에 달려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jiy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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