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자(들)’로 4년 만에 스크린 복귀
진실과 언론의 자유 좇는 사회부 기자
“기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룬 작품 흥미”
[헤럴드경제=손미정 기자] 영화 ‘암살자(들)’의 첫 장면은 트럭 짐칸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가는 기자들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중 한 명은 박해일이 연기한 동성일보 사회부장 재환이다. 짐짝처럼 내동댕이쳐지며 나라의 어처구니없는 검열에 치를 떠는 이들. 온몸에 역력한 고초의 흔적은 1970년대 펜으로 총칼에 맞섰던 이들의 발버둥을 대신 전한다.
1974년 광복절에 벌어진 영부인 저격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암살자(들)’에서 재환은 거짓이 아닌 진실, 나아가 그것을 세상에 전할 수 있는 언론의 자유를 향해 망설임 없이 나아가는 인물이다. 빠른 상황 판단과 냉철한 분석력으로 충격적 사건에 드리운 거짓의 장막을 파고드는 베테랑 기자. 경찰 철구(유해진 분), 영일(이민호 분) 등 주요 인물들 사이에서 사건의 퍼즐을 맞춰나가는 그는, 권력의 억압에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진실을 쫓는 이 영화의 정체성 그 자체다.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배우 박해일을 만났다. ‘암살자(들)’은 ‘한산: 용의 출현’(2022) 이후 그의 4년 만의 스크린 복귀작이다. 영화의 메가폰을 잡은 허진호 감독과는 ‘덕혜옹주’(2016) 이후 10년 만에 재회했다. 그는 “시나리오를 읽고서 ‘이 작품을 하려고 4년을 기다린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캐릭터에 호기심이 생겼다”며 말문을 열었다.
“제가 2000년도에 데뷔해서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기자분들을 만났잖아요. 그런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한 호흡으로 이 직업을 가져가는 작품을 생각해 본 적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허진호 감독님이 재환이란 캐릭터를 제안하셨을 때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 같아요. 굉장히 흥미롭고, 잘해보고 싶었어요.”
극 중 재환은 오롯이 ‘기자’라는 직업인으로서 존재한다. 영화는 그가 여기까지 오게 된 전사(前史)나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도 비추지 않는다. 하지만 무엇이 그를 이렇게까지 움직이는지에 대한 대답은 그리 어렵지 않다. 망설임 없이 선명히 빛나는 눈빛, 그리고 예리함과 냉철함이 공존하는 표정과 행동까지. 박해일이 표현해 낸 재환의 작은 것 하나하나가 그 답을 대신한다.
“처음엔 ‘재환은 가족이 있을까, 결혼을 했을까’ 같은 여러 질문을 던졌어요. 하지만 감독님과 이야기하면서 사족 없이 사건에만 집중하는 캐릭터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계산을 꽤 많이 하는 인물이기에 눈치가 빨라야 하고, 동시에 경험치가 풍부해 앞뒤 문맥 파악도 빠른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감독님이 하나하나 심어주신 대로 연기했던 것 같아요.”
영화 ‘암살자(들)’은 섬세한 미술 작업을 통해 성장과 억압이 공존했던 1970년대의 공기를 그대로 구현해 낸다. 박해일은 자신의 촬영 분량이 없어도 자주 현장에 들러 캐릭터의 톤을 그 시절에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이민호가 연기한 영일이 피격 현장에서 상사인 재환에게 공중전화로 사건을 보고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도 그 자리에 있었다. 이민호는 앞서 진행된 영화 제작보고회에서 “첫 촬영 때부터 박해일 선배님이 와주신다고 해서 부담스럽기도 하고, 너무 긴장했다”며 웃었다.
“저는 현장을 좀 미리 가보는 편이에요. 그게 연기하는 데 유리하다는 생각 때문이죠. 이를테면 재환이 주로 등장하는 신문사라는 공간은 특히나 70년대의 공기가 잘 구현돼 있어요. 속도감 있는 서사를 따라가려면 미리 익숙해지는 작업이 필요하잖아요. 들어가서 앉아보고, 타이핑도 쳐보면서 공간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재환은 진실을 향해갈수록 더욱 거칠게 앞길을 막아서는 권력의 행패와 마주한다. 빨간 펜으로 기사를 마음대로 재단하던 이들은 기어이 재환의 밥그릇을 빼앗고, 그럼에도 정론을 향한 열의를 꺼뜨리지 않는 신문사에 몽둥이를 들고 쳐들어간다. 하지만 재환을 필두로 한 동성일보 기자들은 펜을 꺾기는커녕, 살 떨리는 권력의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도 자유 언론인으로서 굴복하지 않겠다는 결기를 선언한다. 비장함으로 가득 찬 편집국 안에서 재환이 ‘자유언론 선언’을 읽어 내려가고, 권력과 언론이 처절히 부딪히는 이 장면에서 영화는 절정을 맞는다.
“신문사 안에는 류혜영, 김대명, 배성우 등 많은 선후배 배우가 나오죠. 정말 많은 단역 배우분들도 함께하고요. 늘 편집국이란 공간에 같이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배우들끼리 연대가 생겼던 것 같아요. 절정에 이르러 선언문을 외칠 때는 말이 필요 없는, 연대에서 나오는 뜨거움 같은 게 느껴지더라고요. 천천히 녹아드는 게 아니라 오랜 시간 결속된 느낌을 강하게 받았죠.”
오랜만에 스크린에 돌아온 박해일은 대표적인 ‘다작하지 않는 배우’로 유명하다. 1년에 한 편의 작품을 만나기도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영화와 드라마를 가리지 않고 제작업계에서 꾸준히 가장 많은 러브콜을 받는 배우이기도 하다. “가진 게 많은 배우가 아니라서 한 작품을 하고 나면 다른 작품에 바로 들어가기가 힘들다”며 해명 아닌 해명을 내놓은 그는 “나이가 드니 이제는 위기감이 느껴진다”며 앞으로는 작품 활동의 속도를 조금 높여보겠단다.
“하나의 캐릭터나 작품에 들어가면 빠져나오는 시간이 필요했는데, 계속 이렇게 하다간 정말 작품을 얼마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제는 힘쓰는 방식을 조금 다르게 전환해서, 해볼 수 있는 걸 다 해보자는 식으로 마음가짐을 바꾸고 있어요.”
박해일은 다시 만난 허진호 감독과의 각별했던 호흡을 회상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그의 말을 빌리면, 허 감독은 지금 이 시대에 ‘재환’과 같은 인물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감독이다. 다시금 자신을 믿어주고, 또 능력의 최대치를 끌어내 준 감독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허 감독님은 현장에서도 어른 같으세요. 촬영 과정을 함께 나누려는 태도에 배우들은 ‘아, 이분이 나를 믿어주는구나’란 생각에 무장해제 되죠. 저 역시 도전하고 싶은 마음으로 연기했고, 최대한 해보고 싶은 대로 연기했던 것 같아요.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은 건, 배우들을 섣불리 비생산적으로 쓰지 않으려 배려하시는 감독님 덕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balm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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