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현장에서

노사 갈등의 깊은 골을 메우기 위해 어렵사리 마련된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사후조정 테이블이 첫발을 떼자마자 좌초 위기에 놓였다. 지난 3월 조정 중지 이후 무려 5개월 20일간 27차례에 걸친 본교섭과 사상 초유의 전면 파업을 겪은 뒤, 인천지방노동위원회의 중재로 노사가 머리를 맞댄 첫 조정 자리였다. 그러나 첫 만남에서 전해진 것은 합의의 실마리가 아닌 일방적인 회의록 폭로와 파행 소식이었다.

삼성바이오로직스 상생노동조합은 지난 8일 열린 1차 사후조정 회의 후 5쪽 분량의 자체 회의록 문건을 언론과 임직원에게 배포했다. 문건에는 공익위원인 조정위원장의 모두발언은 물론 사용자위원과 근로자위원, 사측 대표교섭위원의 실명과 육성 발언이 따옴표까지 붙은 채 날것 그대로 담겼다. 노동위원회규칙 제27조 제2항은 회의 질서 유지를 위해 위원장 허가 없는 녹음과 녹화, 촬영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노조는 무단 녹음 정황이 짙은 문건을 공개하며 공적 조정 절차의 기본 규칙조차 무시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교묘한 편집과 왜곡이다. 비공개 중재의 특성상 조정위원은 양측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노사 모두에게 날 선 질책을 쏟아내기 마련이다. 실제로 의장은 양측에 모두 양보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노조가 유포한 회의록 1면 머리에는 ‘의장과 근로자위원이 사측의 무성의와 진정성 부족을 질타했다’는 취지의 대목만 자극적으로 편집돼 배치됐다. 참석자 동의 없는 실명 유포와 악의적 편집은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의 소지가 다분한 위험한 일탈이다.

결국 노조가 무리한 ‘세(勢) 과시’에 매달리다 사태를 스스로 악화시켰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미 지난 5월 사상 첫 전면 파업을 단행했던 노조는 추가로 내밀 마땅한 협상 카드가 마땅치 않다. 실제로 2차 파업을 단행하는 순간 바이오의약품 생산 특성상 배치 폐기와 고객사 이탈 등 헤아릴 수 없는 타격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이런 부담 탓에 사후조정 착수 시점에 7건의 법적 소송을 제기하고 회의 직후 2차 파업 결의와 회의록 유포라는 명분 없는 벼랑 끝 전술로 압박 수위만 높인 셈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힘자랑 식 세 과시가 아니라 실질적인 접점을 찾으려는 진정성 있는 대화 자세다.

삼성바이오로직스 노동조합이 지난 4월 인천 연수구 송도 사업장 앞에서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며 투쟁결의대회를 하는 모습. [뉴시스]
삼성바이오로직스 노동조합이 지난 4월 인천 연수구 송도 사업장 앞에서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며 투쟁결의대회를 하는 모습. [뉴시스]

여기서 가장 큰 모순은 노조의 이런 위태로운 행태가 정작 ‘추석 전 타결’을 가장 간절히 바라는 조합원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점이다. 명절 연휴 전 타결금과 합의를 통해 실리를 챙기고 갈등을 끝내길 원하는 현장의 바람을 외면한 채, 지도부의 판 깨기식 폭로전이 타협의 문을 닫아버린 꼴이다. 사용자위원이 제시한 ‘추석 전, 늦어도 9월 22일’이라는 마지노선은 장기 대치에 지친 현장 임직원들의 피로도를 덜기 위해서도 절실했다.

사측 역시 최근 유럽 3508억원 신규 수주로 누적 220억달러 고지를 눈앞에 둔 만큼 사태의 조기 봉합이 절실하다. 그렇다고 ‘원칙’을 무너뜨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노조가 요구하는 인사제도 변경 사전 합의는 인사·경영권을 침해하는 조항이다. 공적 회의 무단 녹음과 일방적 왜곡 유포라는 위법 관행을 시간에 쫓겨 봉합한다면, 회사는 매년 명절마다 파업 협박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원칙 없는 평화’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무너진 절차적 정의와 신뢰를 먼저 바로잡지 않으면 어떠한 합의를 도출할 수 있겠는가. 세계 무대에서 초격차 경쟁력을 다투는 K-바이오 선두 기업의 노사 문화는 떼쓰기와 꼼수가 아닌, 성숙한 준법 의식과 상호 존중 위에서만 바로 설 수 있다.


silverpaper@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