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움의 미학이 빛나는 '5척 작은 거인' -평정심으로 걸어온 40년 금융 외길
서울 종로구 피맛골 근처, 미소금융중앙재단이 위치한 삼공빌딩 7층에 들어서자 이종휘(65) 미소금융중앙재단 이사장이 온화한 ‘미소’로 반겼다. 이사장 본인 얼굴의 캐리커쳐 액자와 작은 화분들로 꾸며진 집무실은 소박했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무보수 명예직인데 사무실이 이 정도면 좋은 거죠. 라디오 음질이 좋지 않아 컴퓨터로 연결해놓은 건데 소리는 제법 괜찮지 않나요?(웃음)”
40년 넘게 금융 외길을 걸어온 ‘연륜’ 때문일까. 여유가 있었다. 상대방의 긴장감까지 풀어놓는다.
외풍에 시달리기 일쑤인, 그래서 늘 경계를 넘나들 수 밖에 없는 금융인으로서 이처럼 롱런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5척이 조금 넘는 작은 키에 카리스마라는 용어와는 어울릴 법 하지 않는 그가 갖추고 있는 것은 바로 균형감각과 절대 욕심부리지 않는 평정심이었다.
▶나는 ‘40년간 우리은행맨’=40년 금융인 인생을 모두 한 은행에서 보냈다. 1970년 우리은행 전신인 한일은행에 입행해 2011년 4월 은행장을 끝으로 퇴임했다. 이동이 잦고 단명하기 쉬운 금융계에서 쉽지 않은 기록이다. 이 이사장은 “그저 운이 좋았다”며 웃었다.
“승진이 빠르지도, 특별히 상을 많이 받지도 않았어요. 제가 5대 은행장이었는데 공모 당시 전임 행장들이 모두 외부인사여서 내부출신에 대한 분위기가 형성되던 때였죠. 황영기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이 저를 적극 추전해주셨습니다.”
상사ㆍ부하ㆍ동료 운도 좋았고 부모님이 주신 몸을 건강히 지킨게 성실한 회사생활의 또 다른 비결이라고 했다. 단 한번도 결근한 적이 없다.
“아예 업종을 바꾸지 않는 이상 그냥 한우물을 파는 게 더 낫습니다. 연봉도 중요하지만 사람관계 등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자산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죠.” 나름의 직장철학이다.
민영화로 조각난 우리금융지주에 대해서는 “자식이 떨어져나간 것 같이 서운하다”면서도 “이번엔 민영화에 성공할 것 같다”고 낙관했다.
▶금융인은 욕심 없어야=금융인은 기본적으로 욕심을 부려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욕심때문에 각종 사고가 터지고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는 것이라며 ‘욕심’을 금융인이 경계해야 할 요소 1호로 꼽았다.
“우리나라 금융시스템은 이미 선진국 수준입니다. 서민금융기관도 잘 설계돼있죠. 그런데 금융사고가 계속되는 것은 맡겨진 역할 외의 것에 욕심을 내기 때문입니다. 돈 더 벌겠다고 설립취지까지 벗어난 투자를 하게되면 분명 문제가 생기죠. 원칙과 기본을 잘 지키면 절대 사고가 나지 않습니다. 정해진 선안에서 활발히 뛰게 하고 그 선을 넘으면 금융당국은 엄격히 처벌해야 합니다. 참 쉬운 말인데 지키는게 쉽지 않죠.”
금융인이 갖춰야 할 덕목으로 ‘균형감각’을 꼽았다. 그는 “금융은 안정감이 중요하다”면서 “한쪽에 치우지지 않아야 하며 판단이 어려울때는 균형점이 어딘지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금융도 서비스업종인 만큼 고객과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태도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 일화를 들려줬다. ‘아찔하면서도 보람된 순간’이란 타이틀을 달았다. 은행장 취임 직후 전임 행장 때 협의됐던 대출건을 검토하다 너무 위험하다는 판단이 섰다. 2700억원짜리 조선소 시설자금 지원 건이었는데 아무리 검토를 해도 답이 안 나왔다고 회상했다. 결국 대출 불가 입장을 통보했다. 3개월간 후폭풍에 시달렸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 회사는 무리한 투자가 화근이 돼 결국 부도가 났다.
여신협의회라는 조직이 엄연히 있는데 행장한테 바로 전화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냥 대출 해줬으면 이래저래 쉬웠을 수 있겠죠. 돌이켜보면 안해주길 참 잘했다는 생각입니다. 금융은 금융일뿐이며 정치화돼서는 안됩니다. 다른 고려사항이 있을 수 없지요. 그런 것들이 누적돼서 사고가 나는 겁니다.”
“제 스타일이 이렇다보니 ‘개성이 없다’, ‘밋밋하다’는 얘길 가끔 듣는데, 오히려 과욕을 부리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모든 갈등은 불통(不通)에서 비롯, 소통이 중요=그 역시 행장 시절 같은 한일은행 출신인 이팔성 전 회장과 사모펀드 투자건 등을 놓고 충돌하기도 했다.
“경영을 하다보면 의견충돌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의견충돌이 있을 때 머리를 맞대고 솔직히 대화할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소통과 대화는 경영진간에도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전임 회장들과는 얼굴 맞대고 가감없이 솔직하게 얘기했습니다. 어느 한쪽으로 결정이 나더라도 사이가 틀어지거나 갈등이 격해지는 경우는 없었죠. 내부인사, 오랜 동료애의 좋은 점인 것 같습니다.”
그는 아울러 “기본적으로 회장은 금융관련 정책과 학식,식견 등을 갖춘 사람, 행장은 은행 내부와 고객을 잘 아는 사람이면 좋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5남매 중 장남, “먹고 살 걱정 없다”는 얘기에 육사 지원=이 이사장은 대구 출신으로 4남 1녀 중 장남이다. 넉넉치 못한 가정형편에 늘 장남으로서의 무게를 느꼈다고 했다. ‘내가 집에서 돈을 갖다쓰면 동생들은 쓸 돈이 없다’는 생각에 고등학생때부터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지 않았다. 육군사관학교에 먼저 지원했다. 군인이 되면 먹고 살 걱정이 없다는 얘길 들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자격미달’. 작은 키가 문제였다.
“제 키가 162㎝인데 그 때 육사 지원조건이 162㎝이상이었죠. ‘너무 작으면 위험하다’고 원수 접수를 안해주더라고요. 중학교 때 자취를 했는데 그때 굶어서 못 큰 것 같습니다. 잘만 먹었어도 5㎝는 더 컸을텐데…(하하)”
서울대(경영대학)로 진로를 바꿨다. 당시 군 미필인 그가 취업할 수 있는 곳은 ‘은행, 삼성물산, 한국전력’ 세 군데 뿐이었다고 한다. ‘졸업예정자’ 신분으로 1970년 2월 한일은행에 입행했다. 그렇게 2011년까지 우리은행맨으로 살았다.
후회는 없을까. “군인 안된 것에 대한 후회는 없어요. 군인은 목소리가 크고 남을 제압하는 카리스마도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렇지 못합니다. 다시 태어나도 금융인으로 살 것 같습니다. 천직인 듯 합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인 시절, 은행장이 된 그는 2011년 4월 퇴임 당시 ‘온화한 카리스마로 위기극복에 성공한 은행장’이란 평가를 받았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순이익 1%는 사회공헌에 써야=입행 이후 꼬박 41년을 우리은행에서 보낸 그는 행장 퇴임 이후 신용회복위원장과 미소금융중앙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난생 처음 “금융이 가진 어두운 이면을 보게 됐다”고 전했다. 소위 ‘있는 사람’을 상대하던 은행 출신 금융인은 결코 경험할 수 없었던 삶의 간극이었다. 서민들의 모습에서 금융의 또다른 가능성을 봤다.
그는 “내년 상반기 출범 예정인 서민금융총괄기구의 핵심역할은 미소금융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소금융은 신용 7등급 이하 또는 차상위계층 이하인 저소득층 자영업자에게 무담보ㆍ무보증으로 지원하는 소액대출사업이다. 그는 “우리나라 인구의 10%가량인 565만명이 영세 자영업자다. 하지만 3명 중 1명은 5년내 실패한다”면서 “제도권 금융회사에서 쳐다보지 않는 저소득, 저신용 영세 자영업자들을 미소금융이 안고 갈 수 있다. 서민금융의 아이콘”이라고 역설했다. 미소금융은 지금까지 13만3000건에 1조3000억원이 지원됐다. ‘미소’라는 용어가 갖는 ‘smile’, ‘micro’의 기능이 잘 작동되고 있다는 것이다.
금융기관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그는 “당기순이익의 적어도 1%는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는데 써야 한다“면서 “금융은 단순히 수익 뿐만 아니라 고객 신뢰도 중요하다. 미래를 생각한다면 가장 중시해야 할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1억원 있다면 연금저축 투자…퇴직하면 금융인 사랑방 만들고 싶어=IT회사에 근무하는 아들과 동덕여대 아동학과 교수인 딸을 둔 이 이사장의 요즘 고민은 올해로 36살이 된 ‘노총각’(?) 아들이다. 그는 “저는 집사람과 대구에서 선보고 4개월만에 결혼했는데 요즘 친구들은 뭐가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며 활짝 웃었다. 국선도와 등산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1살 연상의 아내에 대해 “음악 선생하다 결혼하고 그만둬서인지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와 피아노 반주를 한다”면서 “그런데 나는 교회에 성실한편은 아니다(웃음)”고 했다.
40년 경력의 금융인은 현금 1억원이 있다면 어디에 투자할까. 연금저축을 꼽았다. 그는 “제가 현직에 있을 때는 성과급이나 스톡옵션이 없었다. 100세 시대인데 자식들에게 손 안벌리고 살려면 꾸준히 안정적으로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2016년 9월, 이사장 임기가 끝나면 조그마한 오피스텔을 빌려 전ㆍ현직 금융인이 모이는 사랑방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역사 공부에 대한 욕심도 보였다. 현역 복귀에 대해선 손사래를 쳤다.
“팔 다리에 힘 빠지기 전까진 열심히 일하고 싶은데 노욕(老慾)이라고 할까봐 말하기 겁납니다.(웃음) 더 이상 욕심은 없어요. 그저 지금 맡은 일에만 충실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인터뷰=김형곤 금융투자부장/kimhg@heraldcorp.com
정리=황혜진 기자/hhj6386@heraldcorp.com
■이종휘 이사장이 걸어온 길 ▷1949년 대구 출생
▷1966년 경북대 사대부고
▷1970년 서울대 경영학 학사
▷1970년 한일은행 입행
▷2001년 한빛은행 신용관리본부장
▷2003년 우리은행 경영기획본부장
▷2004년 우리은행 수석부행장
▷2008년 우리은행장
▷2011년 신용회복위원회 위원장
▷2013년~ 미소금융중앙재단 이사장
■이동걸 전 신한금융투자 부회장이 본 이종휘
“정직ㆍ성실하고 법과 질서 의식까지 금융인의 기본을 모두 갖췄다.”
이동걸(66) 영남대 석좌교수(전 신한금융투자 부회장)는 ‘50년 지기’ 이종휘 미소금융중앙재단 이사장에 대해 한마디로 이렇게 평가했다. 같은 중ㆍ고등학교를 나와 나란히 한일은행에 입행한 두 사람은 삶을 함께해 온 동료이자 친구다.
이 교수는 “이종휘 이사장은 성실하고 법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며 “참 조용한데 시간이 갈수록 은은하게 진가가 드러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은 목소리가 크고 주장이 강해야 카리스마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조용한 것과 카리스마는 별개의 문제”라며 “이 이사장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지녔다. 요즘 스타일”이라며 웃었다.
학창시절의 일화도 들려줬다. 이 교수는 “어렸을 때 이 이사장은 너무 조용해서 처음엔 존재감이 없었다”면서 “그저 친구들한테 양보하고 또 양보했다.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이어 “이제는 수십년동안 함께해 온 친구들이 그의 품성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인다. 그만큼 내공이 탄탄한 친구”라고 말했다.
신한금융투자 부회장에서 퇴임 후 고향인 대구로 내려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그는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한달에 한번, 적어도 두달에 한번씩은 서로 만나 회포를 푼다고 했다. 금융계 현안보다는 살아가는 얘기가 주요 화제거리다.
이 교수는 “둘이 만나면 그동안 사회에서 받은 혜택을 돌려줘야 한다. 남은 삶을 사회에 환원하면서 살고 싶다는 얘기를 종종한다”면서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IB관련 프로젝트에 재능기부하는 지금의 삶이 너무 행복하고 갚지다”며 미소지었다.
일각에서 제기되는 현역복귀설에 대해선 “지금의 생활이 너무 좋다”며 일축했다.
황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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