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 침공 이후 달아오른 음악계
‘친 푸틴’ 음악가들 줄줄이 퇴출
“SNS 발달로 맞은 지구인의 시대…
평화와 정의에 대한 목소리ㆍ행동 요구”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무대 위에서 우리는 정치적 언사를 해선 안 됩니다. 우리는 기쁨과 평화를 위해서 음악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환희와 연대를 노래하는 이 음악을 고통받는 우크라이나 국민을 떠올리지 않고선 연주할 수 없습니다.”
세계적인 지휘자 리카르도 무티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난달 24일 미국 심포니 오케스트라홀 무대에서 베토벤 9번 교향곡 ‘합창’을 연주하기 직전 마이크를 잡았다. 무대 위 불문율을 깬 거장은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만난 관객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연대와 반전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관객에게 “우크라이나의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줄 것”을 당부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클래식 음악계가 달아오르고 있다. 조국을 지키려는 우크라이나 국민을 향한 지지는 물론 세계 무대에서 엄청난 업적을 보인 러시아 출신의 예술가들을 향해 입장 표명을 요구한다. ‘무대에서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는다’는 과거의 암묵적 합의는 깨지고, ‘연대의 목소리’가 음악이 되고 있다. 달라진 시대의 요구다.
최근 며칠 사이 클래식 음악계는 큰 변화에 휩싸였다. 전 세계 음악계를 호령해온 ‘친(親) 푸틴’ 예술가들이 줄줄이 퇴출됐기 때문이다. ‘지휘대 위의 차르(황제)’로 불린 발레리 게르기예프, 세계적인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는 그간의 명성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있다.
장일범 음악평론가는 “푸틴의 친위부대처럼 활동하며 특별한 혜택을 받았고, 그로 인해 세계 음악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걸출한 인물들에 대해 이번 전쟁과 푸틴에 대한 명확한 입장표명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며 “푸틴에게 입은 수혜로 쌓은 명성만큼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묻고 있으며, 충분히 납득할 만한 입장이 나오지 않을 경우 반평화적인 행동이라고 바라보고 있다”고 말했다.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빈필하모닉에서의 객원 지휘 취소를 신호탄 삼아 서방에서 누린 모든 직함이 회수됐다. 뮌헨 필하모닉은 계약을 파기했고, 밀라노 라스칼라 극장과 네덜란드 로테르담 필하모닉은 공연 취소와 해고를 통보했다. 이들 세 단체는 게르기예프에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에 대한 비판 입장”이나 “평화 해결을 위한 목소리를 내줄 것”을 요구했으나, 게르기예프는 끝내 입을 다물었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마린스키극장의 총감독이었던 1990년대 초 푸틴 대통령과 인연을 맺으며, 그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세계적인 지휘자로 발돋움하게 됐다. 푸틴이 대통령에 취임한 2002년부턴 ‘핫라인’을 통해 소통하며 각종 정책을 지지했고, 2014년에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강제 합병까지 지지해 논란이 일었다.
러시아 출신의 세계 최정상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도 마찬가지의 상황이다. 메트 오페라는 최근 “네트렙코가 푸틴 대통령에 대한 공개적 지지를 철회하라는 메트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다”면서 예정한 공연을 취소했다. 네트렙코는 앞서 “전쟁에 반대한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예술가들은 정치인이 아니다. 고국을 공개 비판하는 일도 옳지 않다”는 반전 의사를 밝혔으나, 클래식 팬들은 물론 메트 오페라 역시 이러한 메시지가 충분한 답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오는 4~5월 푸치니의 ‘투란도트’와 다음 시즌 베르디의 ‘돈 카를로’ 무대에서 제외됐다. 피터 겔브 메트 오페라 총감독은 그를 “메트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수 중 한 명”이라고 말하면서도,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서 무고한 희생자를 살해하는 한 달리 나아갈 길이 없었다”고 강조했다.
‘전쟁 반대’ 입장을 표명하지 않은 러시아 출신의 음악가들은 점차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캐나다의 클래식 공연 기획사인 밴쿠버 리사이틀 소사이어티(VRS)가 “‘전쟁 반대’ 입장을 공개 표명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어떤 러시아 아티스트의 콘서트도 열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2014년 ‘영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알렉산드르 말로페예프 역시 이러한 이유로 공연이 취소됐다. 반면 러시아 출신으로 영국과 이스라엘 시민권을 취득, 최근 반전 성명을 낸 천재 피아니스트 예프게니 키신은 VRS의 공연 라인업에서 배제되지 않았다.
세계적인 음악가들을 향한 입장 요구는 완전히 달라진 시대 분위기를 반영한다. 불과 8년 전인 2014년 12월 안나 네트렙코가 친러 분리주의 세력이 장악한 우크라이나 도네츠크 지역의 오페라하우스에 100만 루블(한화 약 2000만 원)을 기부했을 당시와 비교하면 상전벽해의 상황이다. 노골적인 정치적 의도가 담긴 이 사건은 일부 외신이 비판했으나, 현재와 같은 파장은 없었다. 전문가들은 “SNS의 발달로 전 세계 뉴스를 일상에서 공유하는 등 ‘지구인의 의식’이 강해지고, 평화와 정의에 대한 공통의 의식이 커져 옳고 그름에 대한 목소리와 행동을 요구하는 시대가 되며 나타난 변화”라고 진단한다. 장 평론가는 “SNS의 활발한 사용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든 상황을 볼 수 있게 됐고, 이를 활용해 언제라도 자신의 입장과 목소리를 밝힐 수 있게 된 만큼 모두의 삶을 위협하는 사안에 대해 강력한 행동과 메시지를 내기를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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