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메리카의 체로키족은 거대한 대머리수리의 날갯짓이 무른 땅을 계곡으로 만들고 진흙을 솟구치게 해 산을 만들었다고 이야기한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카라루 여신은 동굴에서 다양한 생명을 창조했고 이들은 변신을 거듭하며 그곳의 고유한 동물들로 자리 잡았다. 그런가하면 북유럽의 거인 이미르는 후손들에 의해 죽임 당하고 시체의 각 부분은 흙과 바다, 식물과 구름을 형성하게 됐다.
고대인들은 자연의 위대한 풍경을 보고 세상의 처음은 어떤 모습일지 상상했다. 고대인들이 상상한 창조세계, 신화는 5천년이 지난 현대인들에게 수많은 콘텐츠를 낳는 새로운 상상과 창조의 샘이 되고 있다.
인류학자이자 아메리카 원주민 연구의 권위자인 앤서니 애브니 교수는 아프리카에서 북극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구석구석에서 찾아낸 22가지 창조 이야기를 통해 상상의 지평을 넓혀준다. 특히 유럽문화권의 신화나 성서 중심의 창조관에서 벗어나 아즈텍과 마야, 잉카 등 잊혀진 고대 문명의 기원을 발굴하고 나바호족과 틀링깃족, 이누이트 등 다양한 원주민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한다.
유럽의 신과 아메리카의 신은 다르다. 그리스와 북유럽의 신들이 거대한 힘으로 저희들끼리 드라마틱한 권력다툼을 벌이는 것과 달리 안데스 산맥의 잉카족, 북아메리카의 틀링깃족, 메소아메리카의 아즈텍족은 가난하거나 평범한 신들이 자연의 위협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하는 이야기를 전한다.
창세 인간에 대한 이야기도 다채롭다. 아프리카 만데 신화에 등장하는 최초의 인간은 황폐한 땅의 조그마한 왕바랭이 씨앗에서 탄생하고 나바호족의 창조 이야기에는 사람과 동물 사이의 모호한 경계의 ‘곤충 인간’‘제비 인간’ 등이 등장한다.
동물들은 인간과의 관계에서 신비로운 존재다. 아메리카의 코요테는 세상에 왜 죽음이 필요한지 알려주고 틀링깃족의 큰까마귀는 햇빛과 물을 훔쳐 사람에게 나눠준다.
이 책이 일반 신화 이야기와 다른 점은 신화 모음에서 나아가 산, 물길, 동굴, 섬, 극지방이라는 5가지 큰 지형을 줄기 삼아 각 지역을 대표하는 풍경으로부터 어떻게 창조 신화가 탄생했는지 상상력의 비밀을 밝힌 데 있다.
신화 속 거인들은 바위로부터 하늘을 깍아내거나 자신을 희생한 신체 부위로부터 산과 바다, 강물과 대지를 짓는다. 아마존의 소금 여신 파레니가 긴 여행을 떠나며 남긴 자취는 염천과 소금 광맥이 되고, 이프리카의 파로 신이 희생한 몸은 거대한 나이저강이 됐다.
창조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이 인간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무수히 실수를 저지르고 괴로움을 겪고 욕망에 휘둘린다.
이런 창조이야기가 그저 황당한 상상의 산물일 뿐일까? 저자는 신화에 합리적 꼬리표를 붙이는 건 문제의 본질을 놓친 것이라고 말한다. 신화는 과학의 빅뱅 이야기와는 다르다. 저홀로 거대한 우주가 생성되는 빅뱅과 달리 신화에는 인간이 참여해 초자연적인 힘에 맞서 인간 드라마를 써내려간다.
저자는 빅뱅 우주론에 갇혀 존재의 의미를 잃은 현대인과 달리 고대인들이 만물의 순환 과정 속에서 자연과 대화하며 얼마나 충만한 삶을 살았는지 보여주고자 한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천 개의 우주/앤서니 애브니 지음, 이초희 옮김/추수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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