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성장이 ‘뉴노멀’인 시대에 새로운 먹거리를 찾는 것은 전 세계 국가가 직면한 과제다. 한국이 켜켜이 쌓인 규제로 신산업 육성의 기회를 놓치고 있는 지금도 주요 선진국은 적극적인 규제개혁으로 새로운 비즈니스모델을 적극 발굴·지원하고 있다. 이들은 과도하거나 불필요한 규제가 기업의 성장과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규제를 효과적으로 간소화할 방안을 찾았다. 이들의 비결은 한마디로 요약된다. “일단 고(Go)!”다.
13일 세계은행에 따르면 한국의 규제개혁지수는 2021년 기준 1.10으로 세계 32위 수준이다. 2.5에 가까울수록 정부의 규제 개혁이 적극적이라는 의미로 1위인 싱가포르(2.23)는 물론 영국(1.47), 미국(1.45), 일본(1.38) 등 주요국에 비해 현저히 낮다. 경제 규모가 세계 10위권으로 성장하며 명실상부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지만 규제와 관련해선 여전히 소극적이라는 의미다.
같은 기관이 매기는 기업환경 종합평가에서 5위권에 이름을 올리고도 창업 분야에선 순위가 33위로 밀려난 것도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 어려운 환경이라는 방증이다.
박정수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새로운 서비스를 추진할 때 규제가 많을뿐만 아니라 어떤 규제가 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며 “규제 사항을 충분히 검토하고 이를 해결하고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추가로 고려해야 하는 규제가 더 나타난다는 게 기업들의 고충”이라고 말했다.
연구진마다 수치는 다르지만 규제 후진국이 규제 선진국 수준으로 규제를 완화하는 것만으로도 연간 경제성장률을 최소 1.3%포인트에서 최대 2.6%포인트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저성장의 늪에 빠진 우리 경제를 성장으로 이끌 키(key)가 규제개혁인 셈이다.
규제개혁에 있어 선도적인 나라는 싱가포르와 룩셈부르크, 핀란드, 호주, 덴마크 등이다. 일단 싱가포르는 ▷기업 친화 ▷절차 간소화 ▷형식주의 제거 등에 역점을 두고 규제를 타파했다. 금융을 시작으로 교통, 에너지, 의료, 환경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규제를 면제·유예해주는 규제샌드박스를 선도적으로 시행했다.
싱가포르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샌드박스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신기술 기반의 사업을 진행할 수 있도록 규제를 적극 조정했다. 이러한 유연한 규제 환경은 싱가포르를 글로벌 기업의 신사업 실험장으로 만들었고 기업 주도형 벤처 투자가 줄을 잇게 됐다.
노키아의 나라였던 핀란드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촉발된 위기를 극복한 해법도 미래산업 투자를 위한 규제 완화에 있다. 재도약의 계기가 된 디지털 헬스케어 사업이 대표적이다. 핀란드는 민간기업의 의료 정보 수집·활용을 허용하는 ‘바이오뱅크법’을 제정해 빅데이터 구축 기반을 마련했다. 산업이 나아갈 길부터 먼저 열어준 것이다. 한때 노키아로 전 세계 휴대폰 시장을 점령하다 피처폰에서 스마트폰으로의 대전환 시대 실기(失期)하면서 삼성전자에 휴대폰 왕좌를 내줬지만, 핀란드는 강력한 규제개혁으로 신성장 동력을 마련했던 것이다.
승차공유 서비스 도입 당시 교통법을 개정한 것도 우리나라와 다른 점이다. 핀란드는 우버를 합법화하는 대신 택시요금을 자율화하는 등 기존 택시산업 규제를 완화했다.
호주의 경우 2014년부터 규제상쇄제도를 도입해 규제 신설로 비용이 발생할 경우 기존 규제 개선을 통해 그만큼의 비용을 줄이도록 제도화했고 규제철폐의 날과 규제비용 절감목표제도 시행하고 있다.
특히 규제자가 규제를 관리·감독하되 피규제자 친화적으로 운영하도록 하고 있다. 이에 대표 신산업인 수소 산업과 관련해서도 지역사회의 안정을 추구하되 개발과 성장 지원에 초점을 맞추고 규제 체제를 만들고 있다. 적극적인 투자 환경을 확립하겠다는 게 호주 정부의 구상이다.
한국규제학회장인 양준석 가톨릭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가 규제개혁에 대한 의지를 갖고 노력하고 있지만 기업이 산업현장에서 체감할 만한 변화는 부족한 실정”이라며 “법 자체가 경직적인 데다 중복·덩어리 규제가 많고 규제개혁위원회가 다루는 과제도 산업 전반을 아우르는 이슈가 아닌 경우가 많다. 효과적인 규제개혁을 위해 보다 체계적으로 문제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 교수는 특히 “규제샌드박스를 도입한 지 4년째로 유효기간이 종료되는 과제가 본격적으로 나오는데 그 이후 사업을 어떻게 하겠다는 대책이 아직도 없다”면서 후속 조치 마련을 촉구했다.
김은희 기자
ehkim@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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