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님의 부름 받고 온몸바쳐 봉사했건만 결국 버려지는 운명…
화려한 이력 올리고 홀대받는 한국 떠나서 새주인 간택받는 순간 난 화려하게 부활한다
우리들은 중고다. 사람들은 중고를 ‘오래되거나 낡은 것’ 또는 ‘한번 손을 타 하자가 생긴 것’이란 의미로 사용한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은 새것보다 훨씬 더 대접받기도, 홀대받던 한국을 떠나는 순간부터 진가를 인정받는 경우도 있다. 새것이냐, 헌것이냐보다 ‘적재적소’라는 기준을 우리가 선호하는 이유다.
시대가 변해 ‘중고 시장’의 대명사 서울 황학동 시장도 인터넷으로 옮겨왔다. ‘벼룩’이 살 것 같은 ‘벼룩시장’, 도깨비처럼 정신없는 ‘도깨비시장’도 모두 인터넷에 흡수됐다. 매물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우리들은 이력도 화려하다. 거쳐간 다양한 사람들의 손길들은 때로는 ‘아픔’으로, 때로는 ‘기쁨’으로 제품에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다.
시장에서 가장 활기차게 ‘새 삶’을 준비 중인 건 디젤 버스 ‘다타요’다. 다타요 왈, “한국에선 경유 버스가 이제 자취를 감췄지. 서울시만 해도 모든 버스가 다 천연가스 버스로 바뀌었잖아. 하지만 이라크 등 중동국가에선 우리 인기가 장난 아니라네.”
인도네시아나 몽골, 쿠바 등 국가에선 한국에서 수출된 중고 시내버스들이 목적지 간판도 떼지 않고 운행되고 있는 모습들이 심심치 않다. 그들 나라에선 이해도 못 하는 ‘한글’이 되레 인기있는 장식도안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쌩쌩 달리는 다타요는 “한류요? 그 원조가 저희 같은 시내버스 중고차들이에요”라며 웃는다. 다타요의 효용가치는 한국에선 이미 폐기됐지만 ‘수출길’이 열린 덕에 다시 예전처럼 사람들을 태우고 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버스의 경우 고철로 팔면 수출 가격이 1200달러가량에 불과하지만 다타요로 부활하면 10배 안팎으로 가격이 뛴다.
휘어지는 3차원(3D) TV ‘다보여’는 거의 새 제품 상태로 중고 리스트에 오른 경우다. 그는 두 번 주인이 바뀌었는데 처음 팔려간 곳은 서울 성북구 모 재벌 회장댁이었다. 그러나 까탈스런 16살 따님 탓에 박스가 열리기도 전에 다보여는 중고가 돼버렸다. 다보여는 “난 최신 기능이 모두 들어간 TV였어. 하지만 그집 따님은 ‘내가 바라던 게 아니다’며 몇날 며칠을 우는 거야. 결국 다시 되팔렸지 뭐”라고 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다음 차례 주인들은 ‘다보여’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줬다는 것.
한 기부 재단에 넘겨진 그가 설치된 곳은 청각장애 학생들이 함께 공부하는 시설이었다. 다보여는 “‘3차원 화면 인기가 대단했는데 특히 내 빵빵한 사운드는 청각능력이 떨어지는 친구들의 이해를 돕는 데 도움이 많이 됐지”라고 말했다. ‘다보여’처럼 기부 재단을 통해 중고 제품이 재활용되는 사례가 느는 추세인데, 특히 대기업들은 사용연한이 다된 업무 비품을 재단에 기부,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과 사회 공헌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도 한다.
‘다살아’는 인터넷 중고시장에 나왔을 때부터 화제였다. 아파트 거래는 대부분 ‘부동산’을 통해 거래됐고 이곳 중고시장에 아파트가 등록된 것도 처음이었다. ‘다살아’가 중고시장에 등록된 것은 지난 2008년 정점을 찍은 이후 부동산 침체 장기화가 그 원인이다. 다살아는 “처음 분양가는 3억원, 이후 최고가 때는 7억원까지 올랐었지. 하지만 지금은 4억원밖에 안돼”라고 한탄한다. 다살아의 주인은 아파트 6채를 보유한 소위 부동산 부자였는데, 빚을 끼고 무리하게 아파트를 구매하면서 이자 부담을 못 이기고 파산하며 ‘다살아’ 역시 경매에 넘어간 것이다. 실제로 일산과 성남, 파주, 인천 등지 아파트는 2010년 이후 이어진 집값 하락으로 전세가격이 매매가격보다 높아진 ‘깡통주택’들이 급속도로 늘어나는 추세다. 최근엔 중고거래 사이트에 다살아가 심심찮게 등재되면서 ‘깨어진 부동산 불패 신화’를 실감케 하고 있다.
왁자지껄 인터넷 중고시장에 일순 정적이 흘렀다. 중고시장 중앙에 설치된 ‘팔렸다’ 신호에 파란불이 들어왔기 때문. 안내 방송은 “책장인 ‘책만봐’가 구립 도서관에 8만원에 팔리게 됐습니다”고 알렸다. 중고품 모두가 그 소식에 환호했다. ‘책만봐’는 인터넷 중고시장에 4년여를 머문 최장기 대기 제품이었다. 모두들 그의 새로운 도서관 삶을 축하했다. 그렇게 중고 시장은 또 한번의 삶을 기다리는 중고들의 애환을 담은 채 또 하루가 지나갔다.
홍석희 기자ho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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