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슈퍼리치섹션 김현일 기자]‘구글 : 2%, 페이스북 : 1%, 야후 : 1%’
세계적인 IT 기업들의 이 ‘초라한’ 숫자는 각 회사마다 고용된 직원 중 흑인의 비율을 가리킨다. 작년 여름, 해당 기업들은 시민단체의 압박에 못이겨 내부 직원정보를 공개했다.
그 결과, 말 많았던 실리콘 밸리의 ‘백인 우월주의’가 구체적인 통계로 입증됐다. 미국 전체 인구 중 13%가 흑인이지만 여전히 기업들은 백인 남성을 선호한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같은 척박한 환경에서 신예 흑인 기업가가 등장해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바로 트리스탄 워커(Tristan Walkerㆍ31)다. 사업 정체성도 뚜렷하다. 유색인종을 위한 미용건강 사업으로 실리콘 밸리 일대에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유색 인종을 위한 P&G 꿈꾼다=트리스탄은 2013년 자신의 이름을 딴 워커 앤 컴퍼니(Walker & Coㆍ이하 워커앤코)를 창업했다. 워커앤코의 첫 제품은 면도기였다.
트리스탄은 “흑인의 80%가 수염이 억세고 구불구불해 면도하기 쉽지 않고 면도 후 피부 트러블로 고생한다”며 유색 인종의 고충을 해결하기 위한 브랜드 개발에 나섰다. 그 결과 워커앤코의 면도기는 이들의 피부 손상을 최소화하면서 면도를 매끈하게 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그는 “수백년 동안 사람들이 면도를 해왔는데 아무도 이런 제품을 개발하려들지 않았다는 건 정말 말도 안 된다”고 말한다.
처음에 29.95달러를 내면 30일 동안 쓸 수 있는 세트를 보내준다. 20개 면도날, 면도기, 브러시, 오일, 면도크림, 애프터셰이브가 포함돼 있다. 두번째 달에는 90일치 세트를 한꺼번에 보내는데 여기에는 60개 면도날과 90일치 오일, 면도크림, 애프터셰이브가 들어 있다. 90일이 지나면 또 하나의 90일치 세트를 보내주는 식이다. 회비로 매달 29.95달러를 내야 한다.
트리스탄은 워커앤코를 ‘유색인종을 위한 P&G’로 만드는 게 목표다. P&G는 세계 최고의 생활용품 업체다. 소비재 거물이 간과하고 있던 부문에 뛰어든 트리스탄의 아이디어에 실리콘 밸리 투자자들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워커앤코는 지난 2년간 930만 달러(약 101억원)가 넘는 투자금을 유치했다.
▶월가에서의 안정된 삶 버리고 실리콘 밸리로=트리스탄은 네 살 때 아버지가 총에 맞아 목숨을 잃으면서 홀어머니 아래에서 자랐다. 두려움 때문에 밖에 나가는 걸 꺼려해 내성적인 성향을 지니게 됐다.
그가 사회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 2009년부터였다. 당시 트리스탄은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의 컨설턴트를 그만두고 위치기반 서비스를 하는 신생 기업 포스퀘어(Foursquare)를 택했다. 하지만 그의 부인은 남편이 엘리트 컨설팅 회사에서의 안정된 길을 마다하고 걸음마 단계에 있는 스타트업에 들어가는 것이 싫었다. 특히나 그가 흑인이라는 점에서 굳이 그러한 모험을 하는 것이 반갑지 않았다.
그러나 트리스탄은 ‘수백만 달러를 버는 것보다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삶’을 꿈꾸며 월스트리트에서 실리콘 밸리로 향했다. 그의 나이 불과 25세 때다.
포스퀘어에서 사업개발 책임자를 맡은 트리스탄은 스타벅스, NBA, 스타우드 호텔 앤 리조트, MTV 등 최고의 브랜드들과 굵직굵직한 파트너십을 잇달아 성사시켰다. 여기서 발휘한 재능으로 그는 일순간 실리콘 밸리의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2012년 벤처투자사 안드레센 호로비츠(Andreessen Horowitz)에서 그에게 전속기업인(Entrepreneur in Residenceㆍ기업에 상주하며 창업을 돕는 전문가) 자리를 제안해왔다. 트리스탄이 안드레센 호로비츠로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의 다음 행보를 궁금해했다.
이듬해 트리스탄이 내놓은 결과물이 바로 유색 인종을 위한 미용건강 회사 워커앤코였다. 안드레센 호로비츠에서도 자금을 투자하며 그의 성공을 뒷받침했다.
▶흑인, 라틴계, 여성… 소수가 모여 다수가 된 워커앤코=트리스탄의 회사는 실리콘 밸리의 자본으로 무장했고, 콘셉트와 기업문화도 실리콘 밸리로부터 주입된 것이지만 여느 실리콘 밸리 기업과는 다르다.
워커앤코는 애플리케이션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생활문화의 자동화를 뒷받침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회사도 아니다. 소수인종을 위한 사업활동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트리스탄은 유색인종과 여성에게 여전히 높은 벽을 쌓고 있는 실리콘 밸리의 문화를 ‘내재된 편견’이라고 지칭하며 이를 뿌리뽑는 데 집중하고 있다. 이런 신념이 바탕이 되면서 그의 회사엔 다수의 여성과 유색인종이 일하고 있다.
마케팅은 젊은 흑인 청년이, 엔지니어링은 라틴계 남성과 백인 여성이 맡고 있다. 회사 웹사이트의 콘텐츠 개발은 흑인 여성의 몫이다. 파키스탄계 미국인은 고객주문 처리를 담당하고 있다.
무엇보다 백인이 지배하는 ‘화이트 실리콘 밸리’에서 트리스탄이 흑인 기업가로 자리잡았다는 것 자체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아들 그리고 흑인 청소년들을 위한 세상을 물려주는 게 목표=트리스탄은 “24살 때까지 실리콘 밸리의 존재조차 몰랐다”며 “나에게 영감을 준 이가 실리콘 밸리엔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제 트리스탄 본인이 직접 자라나는 흑인 청소년들에게 영감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코딩과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에 재능있는 흑인ㆍ라틴계 학생들을 IT기업과 연결시켜주는 비영리 사업도 그 일환이다.
그동안 흑인은 대중문화와 스포츠 등 다른 분야에선 높은 성취를 이뤘지만 사업 측면에선 충분한 기회를 얻지도, 성과를 내지도 못했다. 하지만 실리콘 밸리에서 주목받는 흑인 기업가로 성장한 트리스탄이 앞으로 이러한 구조를 바꿀 열쇠를 쥔 인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그는 “최근 미국 내 유색인종의 비율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며 “앞으로 기회가 무궁무진할 텐데 이 사업을 포기하는 건 치욕스러운 것”이라고 말한다. 이어 “워커앤코가 오래 지속되는 것이 나의 가장 큰 기쁨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트리스탄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들을 위해서라도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고자 한다. 유색인종이 2등 시민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세상이 바로 그가 그리는 세상이다.
* 트리스탄 워커가 걸어온 길
1984년 미국 뉴욕 출생 → 2002~2005년 뉴욕주립대 스토니 브룩 캠퍼스 경제학 학사(수석 졸업) → 2009년 2월~6월 트위터 인턴 → 2009년 6월~8월 보스턴컨설팅그룹 컨설턴트 → 2009년 8월~2012년 6월 포스퀘어 사업개발 책임자 → 2010년 스탠퍼드대 MBA 졸업 → 2012년 6월~2013년 6월 안드레센 호로비츠 전속기업가 → 2013년 6월 워커 앤 컴퍼니 창업 → 2014년 포춘 선정 ‘40세 이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및 USA투데이 선정 ‘올해의 인물’
*주요 수치
930만달러(2013~2014년 투자유치액) 29.95달러(면도제품 한 세트 가격) 29세(창업 당시 트리스탄 나이)
joz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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