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퇴후 처가식구 보기 껄끄러워 아내와 아이들만 처가로 보내고 집에서 TV나 영화보며 지낼계획 집안 주요행사서 ‘투명인간’대접 ‘독수공방’기러기 아빠도 50만명

#. 대형증권사에서 근무하다 2년 전 명예퇴직한 A씨(40). 올 추석엔 별다른 계획없이 혼자 집에서 TV나 볼 생각이다. 선친의 벌초는 일찌감치 다녀왔고, 아내와 아들만 처갓집에 내려간다. 처가 식구들과 살갑게 지내는 사이도 아닌데다, 실직한 상태에서 서로 안부를 묻는 게 껄끄러워서 집에 남는 것을 택했다. 홀가분한 기분도 들지만, 한편으론 혼자 긴 연휴를 어떻게 보낼까 하는 걱정도 적잖다.

민족 최대 명절인 추석이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연휴가 달갑지만은 않은 대한민국 가장들이 늘어나고 있다.

예전에는 ‘시월드’(시댁)에서 차례상 준비 등으로 등골 휘는 아내들이 겪는 고통이 집중 조명을 받았다.

하지만 최근엔 남편들도 실직이나 자녀 교육 문제 등으로 가족에서 소외돼 ‘명절 스트레스’를 받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자의반ㆍ타의반으로 연휴 동안 혼자 집을 지키면서 TV나 영화로 시간을 때우겠다고 계획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 실정이다.

21일 통계청과 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가족과 떨어져 국내에 홀로 거주하고 있는 남성 가장(기러기 아빠)은 약 50만명으로 추정된다. 2015년에 국내 1인 가구 숫자가 500만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 가운데 이들 중 약 10%를 기러기 아빠가 차지하는 셈이다.

물리적인 이유 때문에 혼자 추석을 보내는 경우도 있지만, 일부러 연휴 기간 ‘독수 공방’을 선택하는 남편들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이유로 경제적 문제가 꼽힌다. 최근 1년새 취업을 포기한 구직 단념자는 53만9000명(8월말기준)까지 급증하며 사상 최대치를 경신했다.

‘38선(38세까지도 선선히 퇴직을 받아들인다)’, ‘사오정(45세 정년)’, ‘오륙도(56세까지 직장에 있으면 도둑)’라는 용어가 보편화 될 정도로 중년 가장들의 이른 퇴직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젊은 남편들도 연휴가 반갑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최악의 교통체증을 뚫고 겨우 처갓집에 도착하면 그때부터 ‘집안일 눈치’를 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고 아이 양육이 외가 중심으로 이뤄지는 모계사회 경향이 강해진 점도 명절 부담으로 다가온다.

전문가들은 전통적 의미의 가정이 붕괴되고 경기 불황이 계속되면서 명절 등 중요한 가족 행사에서 남편들이 겉도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최근 경제사회적인 이유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이나 역할을 찾지 못하는 남편들이 늘어나면서 가족 단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며 “어려운 시기일수록 가족들이 사소한 부분에서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법관 출신인 가사 전문 이현곤 변호사는 “명절 때 무조건 시댁이나 친정을 방문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며 “교통체증 없이 편하게 방문할 수 있는 날 양가 부모님을 찾아뵙는 것도 불필요한 부부싸움을 줄이는 방안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양대근ㆍ김진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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