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올 한 해 국내 엔터테인먼트 업계는 놀랍도록 판이 커졌다. 연예기획사와 제작사가 ‘차이나 머니’의 수혜를 입고 덩치를 키운 해였다.
연예기획사는 배우 매니지먼트는 물론 드라마ㆍ영화ㆍ예능 제작까지 손을 대고, 제작사는 콘텐츠 생산에 그치지 않고 배우 매니지먼트까지 확장하는 사례가 늘었다. 불과 1년 사이 국내 엔터테인먼트 산업 지형도는 복잡다단한 변화를 맞았다. 영화, 방송, 가요 등 전방위로 이뤄진 변화이나 중국 현지에서 사랑받는 국내 드라마 시장의 변화는 상당히 극적이다.
▶ ‘차이나 머니’의 전방위 유입=이달 8일 국내 굴지의 콘텐츠 제작사 초록뱀미디어는 남희석 김신영이 소속된 SH엔터테인먼트 인수 계획을 밝혔다. 초록뱀미디어는 김수현 공효진 주연의 ‘프로듀사’(KBS2), 서바이벌 오디션 ‘K팝스타’(SBS)는 물론 ‘올인’, ‘주몽’을 만든 제작사다. 초록뱀미디어가 드라마제작사 김종학프로덕션의 모 회사인 SH엔터테인먼트를 인수할 수 있었던 것은 ‘차이나 머니’의 유입 덕분이다. 초록뱀미디어는 지난달 유상증자를 통해 중국 DMG그룹으로부터 250억원 규모의 자금을 유치했다.
현재 국내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선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사례다. 매니지먼트를 겸하지 않더라고, 영화배급사 뉴(NEW)는 중국 엔터테인먼트 기업 화책미디어와 손을 잡고 현지 법인 화책합신을 설립했다. 한국영화(마녀, 뷰티 인사이드, 더 폰)의 리메이크를 진행할 계획이다. 뉴(NEW)의 2016년 또 다른 도전은 송혜교 송중기 주연의 KBS 2TV 미니시리즈 ‘태양의 후예’로 브라운관 신고식을 치른다는 것이다. 또 다른 드라마제작사 그룹에이트는 홍콩 엠퍼러엔터테인먼트로부터 150억원을 투자받아 이영애 송승헌 주연의 ‘사임당’(SBS)을 제작 중이다.
아이돌 및 한류스타가 포진한 연예기획사 역시 움직임이 분주하다. 씨엔블루 FT아일랜드 AOA가 소속된 FNC엔터테인먼트는 중국 민영기업 쑤닝 유니버셜 미디어로부터 330억원에 달하는 투자금을 유치했다. FNC는 심지어 유재석 정형돈 노홍철 등 스타 방송인을 줄줄이 영입, 2016년 예능 제작의 문을 열었다. 올해에는 드라마 ‘학교 2015’(KBS2)를 제작해 좋은 성과를 냈다. 최근엔 ‘시크릿가든’ 등을 히트시킨 신우철 PD를 영입해 드라마 제작에 본격 시동을 걸었다.
김우빈, 장혁의 소속사인 IHQ는 가요기획사 큐브엔터와 전략적 제휴를 맺고 CU미디어와 합병하며 큐브TV, 코미디TV 등 IHQ 미디어를 운영하고 있다. 드라마 제작에도 활발했던 IHQ는 올 7월 중국 미디어기업인 상하이미디어그룹(SMG)의 자회사 SMG 픽쳐스와 엔터테인먼트 사업 분야에서의 전략적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현재 중국계 자본의 유치를 위해 유상증자 또는 지분매각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IHQ의 2016년 기대작은 KBS 2TV의 ‘함부로 애틋하게’(김우빈 수지 주연)다.
드라마 ‘송곳’을 제작한 씨그널 엔터테인먼트 그룹은 올 한 해 김현주 이미연을 영입 매니지먼트를 겸하고 있다. 씨그널의 중국 시장 진출은 공격적이다. 음악은 물론 게임까지 손을 댔고, 홍콩 현지법인 설립과 함께 중국 대형 방송사와 펀드를 결성해 대륙에서의 엔터사업을 본격화했다.
그 밖에도 엔터테테인먼트 업계 전반에서 중국 자본은 확산됐다. 아이유가 소속된 로엔엔터테인먼트는 중국 인터넷 기업 ‘르TV’와 손 잡고 중국 합작법인 설립을 위한 MOU를 체결했으며, 이광수 등이 소속된 배우 매니지먼트사인 킹콩엔터테인먼트, 에이큐브(에이핑크, 허각)을 인수 드라마 제작 신호탄을 쐈다. 국내 대형연예기획사 SM엔터테인먼트는 자회사 SM C&C를 통해 이미 콘텐츠 제작을 겸하고 있다. 다양한 드라마와 예능을 국내 안방에 선보였고, 중국 아이돌 그룹을 육성하는 한중 합작 예능 ‘타올라라 소년’을 통해 중국 방송시장에도 손을 댔다. 2016년엔 중국 법인 설립을 목표로 세웠다. SM의 노하우를 중국 땅에 이식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 중국은 왜, 한국은 왜?=일본시장의 문이 닫힐 무렵 전 세계 대중문화시장의 보고로 떠오른 중국에서 국내 콘텐츠가 힘을 발휘했다. 지상파 방송사가 내놓은 인기 예능 프로그램(아빠 어디가, 나는 가수다)를 시작으 ‘예능한류’가 각광받았다. 채널을 아우른 예능 콘텐츠의 수출이 대륙의 문을 먼저 열었다.
중국에선 국내 예능 프로그램이 히트를 거듭한 데다, 드라마의 인기를 재확인하며 한국 콘텐츠의 가치가 높아졌다. 지난해 초만 해도 “중국 인터넷 사이트에선 한국 드라마를 구입하기 위한 ‘출혈경쟁’에 한창이었고, 예능 콘텐츠의 ‘완벽한 복제’를 요청하는 목소리”(중국판 ‘불후의 명곡’ 황재환 작가)가 높아졌다. 중국이 원하는 것은 분명했다. 콘텐츠 제작 노하우였다.
한국의 경우 중국은 ‘새로운 출구’였다. 다채널 시대에 접어들며 국내 엔터테인먼트 업계는 포화상태를 맞았다. 회당 평균 4~5억원을 들여 드라마를 제작해 성공한다 해도 남는게 없는 장사가 됐다. 탄탄한 기획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젠 제작을 못하겠다”고 하소연하는 중소 제작사 관계자들이 적지 않은게 현상황이다.
한 드라마제작사 관계자는 “올 한 해에도 지상파에서만 100여편 가량 제작됐으나, 수익이 난 드라마는 딱 한 편 뿐이었다”고 귀띔했다. 이젠 “손해만 안 보면 다행”인 구조가 됐다. 배우와 작가의 몸값은 충분히 높아졌는데, 중국 자본의 유입으로 이들의 출연료 인플레 현상이 빚어졌다.
또 다른 드라마 업계 관계자는 “중국 엔터산업의 한국 진출로 더 뚜렷하게 나타난 변화는 스타파워가 커졌다는 점이다. 중국에선 김수현이나 아이돌 등 A급 이상의 연예인을 선호하고 있는 추세”라고 말했다. 결국 공룡 엔터사의 줄 이은 등장은 한류스타들이 포진한 연예기획사가 이들의 이름값으로 투자를 유치받고, 직접 제작까지 겸하게 되며 빚어진 모습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기획사를 겸하지 않는 국내 제작사들에게 중국 시장은 숨통을 틔워줄 수 있는 ‘수익 창구’였다. 올 들어 중국 자본을 유치한 제작사들이 등장한 것도 이 같은 이유다. “하루가 다르게 규제가 강화되는 중국 시장”(박상주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 국장)의 장벽을 뚫기 위해 중국 자본으로 합작콘텐츠를 만들고, 현지 법인을 세워 좀 더 수월하게 진입하는 접근방식을 취하고 있다. 한중FTA 이후를 대비한 전략이다.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윈윈 전략’처럼 보이나, 내부 사정을 깊이 들여다 보면 입장에 따라 누군가에게 이 시장은 ‘막다른 골목’이다. “중국 시장에서 나온 성과를 다시 제작비에 투입하는 형태로 생존을 이어가는 전략”이라는 것이 박상주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 국장의 설명이다.
▶ 제2의 대만이냐, 제3의 활로냐=‘차이나머니’로 덩치를 키운 국내 엔터테인먼트 업계를 바라보는 시각은 두 가지다. 우려와 기대다.
중국 시장 진출 단계부터의 우려는 한결같았다. 국내의 고급인력과 노하우 유출 문제다. 여기에 중국 자본까지 들어온 시점에서 ‘제2의 대만’ 사태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판관 포청천’, ‘꽃보다 남자’ 등 인기 드라마 콘텐츠로 아시아 시장을 이끌었던 대만은 중국의 대규모 자본이 들어오며 잠식당했다. 제작 노하우를 갖춘 PD, 작가 등 고급인력들이 중국으로 건너갔고, 스타들도 중국 활동에만 매달렸다. 중국 자본은 대만의 탄탄한 제작사를 빠르게 흡수했다. 대만이 아닌 중국 현지 입맛에만 맞춘 콘텐츠가 쏟아졌고, 내수시장에서의 성과가 줄고, 배울게 없어지자 중국 자본 역시 함께 철수됐다.
국내 대형 연예기획사 관계자는 “대만은 지금의 한국처럼 컬쳐테크놀로지가 중국보다 뛰어났다. 그러나 자본의 힘으로 몇 십년간 방송 포맷, 아티스트들의 엑기스가 흡수당한 이후 추락 일로에 놓였다”며 “연예기획사나 제작사가 중국자본을 받아들일 때 간과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긍정적인 시각도 있다. 올 하반기 중국 자본의 투자 흐름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이동했다는 점을 업계 관계자들은 포착하고 있다.
박상주 드라마제작사협회 국장은 “올 상반기까지 중국 자본은 드라마 제작사 M&A를 통해 가져가려는 구조가 있었다. 이로 인해 자본 잠식의 우려가 나왔다. 하반기에 들어선 콘텐츠에 대한 투자가 등장했다”고 말했다.
기업을 인수하려는 중국 자본의 유입이 아닌 개별 콘텐츠에 대한 투자는 “수익과 리스크를 함께 배분하는 구조”이기에 다른 시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박 국장은 “중국 자본의 부정적 요소를 배제할 순 없지만, 영국이 미국 자본의 도움으로 콘텐츠 강국으로 성공한 사례가 본보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정책적인 보완은 필요하다. 업계 관계자들은 이미 “중국의 콘텐츠 제작 역량은 한국에 근접한 수준”이라고 봤다. 특히 드라마 제작 기술력은 막대한 자본의 투자로 “한국과 비슷하거나 이미 앞선 수준”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아직 부족한 것은 기획력을 갖춘 ‘맨파워’다. 때문에 국내에선 드라마, 예능 PD와 작가 등 고급인력의 유출을 우려한다.
박상주 국장은 “기획력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 사람이 가장 중요한 산업이 됐는데, 인력 유출을 막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가 없어 아쉽다”며 “인력에 투자하는 자본은 미미하고, 보호할 수 있는 장치도 없다. 프로듀서를 양성하는 시스템도 국내에선 드라마제작사협회가 유일하다. 고유의 콘텐츠를 만들 인력이 없다면, 당연히 산업은 붕괴될 수 밖에 없다. 자국의 콘텐츠가 자생할 수 있도록 정책적으로 양성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업계에선 조금 더 큰 그림을 그려가고 있는 상황이다. 거대한 중국 자본의 투자로 제작한 콘텐츠가 글로벌 유통 창구를 만나면 새로운 활로가 열릴 것이라는 기대다. 넷플릭스의 한국 진출을 엔터테인먼트 업계가 전략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시각이 나오는 이유다. 한국케이블TV협회 박승범 홍보부장은 “넷플릭스를 통해 국내 드라마와 예능 등의 콘텐츠가 중국을 넘어 글로벌 무대에 선보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상주 국장 역시 “한국 시장이 넷플릭스에겐 중국에 진출할 수 있는 중개무역 같은 시장이다. 양측 모두가 효과를 볼 수 있다”며 “넷플릭스에선 중국시장에서 검증된 한국 콘텐츠를 통해 아시아를 공략하고, 한국은 글로벌 유통 채널인 넷플릭스를 플랫폼 삼아 중동, 남미, 영국 등에 진출할 수 있는 새로운 창구가 생길 수 있다”고 봤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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