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일 · 술자리 ·주말골프까지… 집보다 밖에서만 지냈던 아빠들 일찍퇴근 자녀 학원 바래다 주고 “사랑해, 고마워” 등 표현 많아져 세월호 영향 일상의 가치 재발견
‘월화수목금금금.’ 회사 일로 정신없이 살던 대기업 임원 남정우(가명) 씨는 최근 ‘월화수목금’으로 일상의 궤도를 선회했다. 학원에 다니느라 바쁜 고3 딸의 운전기사 노릇을 하기 위해서다. 가능하면 주말 출근을 자제하고 30분가량 딸과 함께 차를 타고 가면서 학교생활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눈다. 남 씨는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아이와 자주 대화를 하고 평소에도 후회없도록 가족과 많은 시간을 함께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400여 명의 고등학생을 태운 세월호가 침몰한지 13일째 접어들면서 일상에 매몰돼 살던 소시민들의 삶도 변화하고 있다.
마지막 대화도 없이 부모ㆍ자식을 보낸 이들의 절절한 사연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가족의 소중함을 되돌아보게 된 것. 정부가 사건당일부터 단 한 명의 생명도 구하지 못하는 등 무능력한 모습을 보이자, 무기력감을 느낀 시민들이 평범한 삶으로 회귀하는 것으로 보인다.
세월호참사는 가족들의 생활태도를 변화시키고 있다. 결혼을 앞둔 직장인 정모(30ㆍ여) 씨는 “현장에서 실종자 부모가 시신을 찾을 때 아이의 특징을 설명해주면 스스로 본인의 자식인지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고 들었다”며 “평소에 가족끼리 대화를 많이 하지 않으면 이런 상황에서 가족을 찾기 힘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또 “가족간에 관심을 갖는게 중요하다는 걸 깨달아 결혼하기 전에라도 집에 일찍 들어가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는 아버지들의 마음도 변화시키고 있다.
중견건설업체에서 일하는 박모(45) 차장은 “늘 일에 치여 살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는 핑계로 일주일에 3~4번은 술자리를 가졌지만 이젠 가능하면 집에 일찍 들어가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을 많이 가져보려 한다”며 “그동안 아이들에게 사춘기 이후 자녀에게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사랑한다’는 표현도 많이 해줄 생각”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에 대해 ‘분노와 슬픔을 이겨내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김경일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는 “주변 상황에 감사하거나 분노하는 것은 슬픔을 이겨내는 당연한 과정이지만 안타까운 건 우리 사회가 꼭 대형참사가 터지고 나서야 비로소 소소한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는다”며 “공생에서 존재의 가치가 생겨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진표 서울아산병원 정신과 교수는 “우리 사회가 핵가족화로 점점 개인주의화가 돼가지만 세월호 참사로 가족간의 끈끈한 정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 당연하게 생각되었던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희망이 될 수 있음을 사람들에게 깨닫게 해주고있다”고 했다.
한편 실종자 중 단 한 명의 생명도 구하지 못한 정부에 대한 실망감 역시 시민들을 소소한 일상에만 집중하게 하고 있다.
중학교 교사인 최모(29ㆍ여) 씨는 “세월호 사건에 대처하는 정부를 보며 언젠가 나에게 저런 사건이 생겼을 때도 이 나라는 나를 구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며 “다른 나라에 이민을 가서 살거나 정치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소소한 일상에만 집중하면서 살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채정호 서울성모병원 정신과 교수는 “이번같은 충격적 사건은 사고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계속적인 언론보도 등을 접하면서 잠재돼 있던 우울한 감정이 더욱 악화될 수 있다”며 “극도의 심리적 불안함으로 일생생활로의 복귀가 힘들거나 무기력함을 느낀다면 적극적으로 심리치료를 받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김태열·서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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