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한 신경으로 옳고 그름을 적어내려가던 신문기자(JTBC ‘아내의 자격’)는 소름끼칠 만큼 황폐하고 섬뜩한 속물이었고, 정갈한 뉴스앵커는 외도를 일삼고도 뻔뻔한 찌질남(SBS ‘결혼의 여신’)이었다. 장현성의 얼굴은 또 한 번 달라졌다. “대통령이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국민이 뽑았다는 것만 기억하라”고 말하는 원칙과 사명으로 무장한 대통령 경호실장(SBS ‘쓰리데이즈’). 현재 방영 중인 ‘쓰리데이즈’에서 장현성은 3회 만에 퇴장한 ‘반전 캐릭터’다. 대통령 저격을 시도하다 죽게 된 경호실장 함봉수. 물론 함봉수는 죽어도 죽지 않고 드라마 속 회상신을 통해 얼굴을 비쳤다. 이런 등장이 “꽤 마음에 든다”는 장현성을 만난 날은 맑고 화창해 봄기운이 완연한 때였고, 그 어떤 비극도 일어나지 않은 날이었다.
“4월5일 목요일. 바람은 남쪽으로 분다. 대군의 배가 일곱 척, 몇 리 앞으로 다가왔다. 마을엔 먹을 것이 없다. 세 마리 남아있는 닭을 삶아 아픈 병사들에게 먹였다. 귀뚜라미가 운다.” 장현성은 불현듯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를 대본처럼 술술 외웠다. 그러더니 “함봉수는 말이 많진 않지만 필요한 말은 정확하게 전달할 줄 알고, 군인으로서의 철저한 사명과 국가관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한다. “뾰족한 칼도, 날이 바짝 선 단도도 아니며, 이순신 장군이 썼을 것 같은 장검 같은 문장”으로 채워진 ‘칼의 노래’를 닮은 사람이라는 설명이다.
드라마에 캐스팅된 이후 그는 함봉수를 만들어가는 첫 단계에서 이 소설을 먼저 읽었다. 올곧은 ‘무인’같은 경호실장 함봉수를 이해하기 위해 경호관 지침을 찾아보고, 퇴역경호관의 삶도 배워봤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훈련을 수백번씩 하며 본능을 이겨내야 하는” 경호관의 삶을 드라마 안으로 옮겨오기 위한 과정이었다.
마흔 다섯에 만나게 된 대통령 경호실장은 배우 장현성 안에 숨어있는 “백 가지 얼굴 중 하나를 최대치로 끌어올린 역할”이었다.
“군인정신, 애국심. 글쎄요.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군인정신은 찾아볼래야 찾을 순 없겠죠. 하지만 조금 더 나은 사회를 주고 싶다는 마음은 같지 않을까요.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막연히 사회에 울분이 있던 시기가 않잖아요. 그 시기를 지나 마흔을 넘은 지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40대 중반은 책임을 져야 하는 나이인데, 어린 친구들이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살아가게 해주기 위해 얼마나 성실하게 달려왔나 싶은 생각이 들죠.”
나라가 어수선했던 시절 대학을 다닌 장현성은 연극 연출을 전공했지만, 문예창작과 동기들과 어울리며 막걸리 한 사발 곁에 두고 대자보를 쓰던 학생이었다. ‘활자의 세례’가 주는 감격에 숱한 책을 끼고 살았고, 개봉영화마다 보고 다녀 스폰지처럼 다른 사람들의 삶을 흡수하던 때도 있었다.
연극 연출 전공자라는 ‘공인된 실업자’로 사회에 나온 장현성이 배우의 길로 접어든 건 “월급도 준다”기에 학전 오디션을 봤던 게 계기가 됐다. “지금은 용 됐다”며 “그 때엔 누가 봐도 시골아저씨 같은 외모”에 “끼도 없던” 자신이 배우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다고 한다. “세월이 좋아지니 이 외모로도 먹고 살고 있다”는 그 시간이 벌써 20년이다. 장현성의 연기인생 뒤로 적힐 필모그래피는 1994년 극단 학전을 통해 무대(연극 ‘지하철 1호선’)에 오른 이후 A4 용지 몇 장을 빼곡히 채울 만큼 숱하고, 이제는 “배우가 안 됐으면 뭘 하고 살았을까” 싶은 생각을 한다.
“한 번 살기도 바쁜데, 여러 인생을 살아보는 배우라는 직업은 참 매혹적이에요. 운이 좋으면 사람들이 좋아해주기도 하고, 건강하다면 정년도 없죠. 반면에 감정노동을 하는 직업이다 보니 그 감정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날들도 있죠. 이 일을 시작한 건 진정성 있는 감정과 이유를 던져주고 싶은 건데, 원하는 인물이 잡히지 않을 땐 본의 아니게 거질말을 하는 것 같은 순간이 와요. 그런데도 ‘배우가 좋냐’고 묻는다면 그래도 좋아요.”
새 영화 ‘쎄시봉’을 통해 이장희 역을 맡은 장현성은 지금 또 새로운 사람의 삶을 밟아가고 있다. 기타를 배운지는 이제 한 달쯤, 장현성의 손 끝에 굳은살이 내려앉았다. “영화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장면은 한 장면 있을까요. 평생 음악을 해온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잖아요. 그 사람을 만나는 과정이에요.” 새로운 누군가가 되기 위해 그를 만들어온 수많은 이야기를 추적하는 건 배우 장현성의 일과다. “무수히 많은 정보를 단단한 공으로 뭉쳐놓은 뒤에 날카로운 칼로 쓱 잘라 ‘이게 진짜 네 모습’이라고 말해주고 싶죠. 일기를 쓰는 것조차 솔직하지 못한 세상에 살고 있잖아요. 내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그걸 보여주고 싶어요.”그리고 그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 가장 행복하다고 장현성은 말한다.
열심히 몰입해 만난 캐릭터와 헤어지면 장현성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되돌아온다. ‘준준(아들 준우-준서)형제’를 위해 엉터리 미역국을 끓이는 헐렁한 아빠, 한 동네에서 20년을 살아도 길 찾기에 서툰 중년이다. “배우가 아닌 장현성의 삶이요? 자전거 타는 걸 좋아해요. 자전거를 타며 바라보는 세상의 속도가 제겐 딱 맞는 것 같아요.”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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